독일 교육의 서술형 시험을 통해 본 '토론과 글쓰기의 상관 관계'
독일 교육 현장에서는 모든 시험을 객관식 없이 주관식과 글쓰기로 합니다. 토론식 교육이 바탕이 돼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말과 글의 관계는 깊습니다. 토론이 글쓰기 능력 향상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토론 활동을 어떻게 글쓰기에 활용할 수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독일 교육에 대해 소개하는 여러 글(인터뷰 기획 시리즈, 한국과 다른 독일학교의 시험 풍경, 독일 의대생이 말하는 독일 교실의 토론 교육)에서 이미 숱하게 거론했다시피 독일 학교는 모든 과목에서 객관식 없이 주관식과 글쓰기로만 시험을 봅니다.
오늘 주제인 토론과 글쓰기의 관계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하기 전에 먼저 얼마 전 우리집 아이와 '서술형 시험'에 대해 나눈 짧은 인터뷰를 소개하겠습니다. 알다시피 독일 교육은 토론 방식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글로 써야 하는 서술형 시험 방식은 당연한 것인데요, 정작 그런 학습 방식으로 공부하고 있는 아이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참고할 만한 인터뷰 내용이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한국 나이로 13세인 아이는 독일 교육을 받고 있고 현재 6학년입니다. (**독일 학제에 따라 4학년에 초등 과정을 마쳤고 5학년부터 중등 과정이 시작됐습니다.)
Q. 한국 학교는 시험에서 객관식 비중이 높은데, 서술형으로 시험 보는 거 어렵지 않아?
"(질문 자체를 이해 못하겠다는 듯 눈을 크게 뜨며) 아니, 전혀!"
Q. 너무 익숙해져서 그런 것 아닐까?
"음, 내 생각에는 서술형 시험이 더 좋은 거 같은데."
Q. 그래? 네가 생각하는 서술형 시험의 장점이 뭔데?
"먼저, 찍기가 불가능해. 찍는 건 추측으로 맞히는 건데, 그걸로 실력을 평가한다는 건 말이 안돼. 5개의 보기가 있다고 하면 찍기만 해도 맞힐 확률이 20%나 되잖아. 그리고, 문장을 만드는 능력을 키울 수 있어. 문장 하나하나도 그렇지만 처음과 중간, 끝을 항상 나누어서 써야 하기 때문에 전체 글을 쓰는 능력도 길러져. 또 글씨를 잘 쓰는 연습까지 저절로 돼. 이건 숙제에도 해당되는데 많이 쓰다 보니까 좋아지는 것도 있고, 또 글씨를 잘 못 써서 선생님이 알아보지 못하면 감점을 당하기 때문에 바르게 잘 써야 하거든."
Q. 서술형 시험은 점수를 어떤 기준으로 매겨?
"과목마다 조금씩 다른데, 독일어 시험을 예로 들면 70%는 스토리를 만든 아이디어, 글이 흥미로운지, 그리고 처음 중간 끝을 잘 맞춰 썼는지 완성도를 보는 거야. 나머지 30%는 문법을 봐. 문장을 쓸 때 문법이 틀리면 감점이 되는 거야. 문법은 모든 서술형 시험에서 다 봐. 심지어 영어 시험에서 영어를 독일어로 번역하는 문제가 나와도 번역한 글을 문법에 안 맞게 쓰면 감점이 돼."
Q. 서술형 시험은 객관식처럼 정답이 없는데, 그래서 더 긴장할 것 같아. 예측이 안 되니까. 너도 가끔 시험 보고 와서 성적이 어떻게 나올지 몰라서 긴장하곤 하잖아. 그런데도 서술형 시험이 괜찮아?
"응, 객관식은 보기 자체가 이미 정답의 확률을 좁혀주잖아. 어떤 문제에 대해 내가 100% 몰라도 답을 맞힐 수 있는거지. 그런데 글을 쓰는 건 내가 100% 만들어내야 하는 거야.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잘 하고 있는지를 평가하는 게 시험인데 혼자서 해내야 하는 서술형 시험이 제대로 된 평가라고 생각해. 좋은 점수를 받았을 때 느끼는 성취감도 더 크고."
Q. 선생님 평가에 불만을 가질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그런 경우는 거의 못 봤어. 선생님이 시험 후에 어떤 기준으로 평가했는지 평가서를 보여주며 설명을 해주기도 해. 그리고 어느 정도 평가를 위한 가이드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또 선생님들이 준 성적을 마지막에 교장 선생님이 다 확인하는 순서도 있는데, 아마 내 생각엔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는 과정인 것 같아. 시험 때문은 아니고 수업 참여 등에 대한 점수가 생각보다 덜 나왔을 때(**독일 학교의 성적은 시험 뿐만 아니라 평소의 참여 태도, 발표, 숙제 등의 비중이 아주 높습니다.) 선생님께 얘기하는 경우는 있어. 그러면 선생님들이 그 후로 더 관심을 갖고 그 친구의 수업 태도 등을 살펴보기도 한대."
Q. 만일 객관식과 서술형 글쓰기 시험 중에 선택할 수 있다면 넌 어떻게 할 거야?
"나는 서술형을 택할 거야. 자유롭게 내 생각을 쓸 수 있잖아. 또 성취감도 있고."
Q. 성취감? 서술형 시험에서 어떤 성취감을 느끼는데?
"많이 쓰다 보니까 더 잘 쓰게 되는 것도 있고 또 선생님이 가끔 시험 결과에 코멘트를 써주기도 하거든. 잘한 것에 대해 칭찬도 해주고 부족한 점이나 다음에 보충할 것들을 지적해주기도 해. 그런 데서 얻는 성취감이나 보람이 있어."
Q. 혹시 서술형 시험에 어떤 게 나오는지 예를 들어줄 수 있어?
"독일어 시험의 경우 생일 파티가 배경이었는데 (**구체적 배경이 등장하지만 자세한 내용은 생략합니다.) 햄스터 한 마리가 사라져서 찾는 이야기야. 그 찾는 과정을 아주 구체적으로 전부 다 상상해서 써야 해. 45분 동안 쓰는데 처음엔 먼저 '처음-중간-끝'에 어떻게 쓸 지 간단하게 정리한 다음에 쓰라고 권해. 보통 (A4 크기의) 노트 2장 정도를 꽉 채워 써."
Q. 그렇게 많이 써?
"근데 별로 어렵지 않아. 다들 2장을 쓰는 건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 오히려 그 안에서 글을 끝내야 하는 게 힘들지."
Q. 글 쓰는 서술형 시험 말고 그냥 주관식 시험은 어떻게 나와?
"그런데 주관식 시험도 간단하게 답만 쓰지는 않아. 왜 그런지 이유를 설명하라고 해. 예를 들어 어떤 동사의 변형에 대한 문제라고 하면, 변형된 답을 쓰고 그렇게 되는 이유를 써야 하는 거야."
Q. 토론 수업이 글 쓰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
"그렇지. 생각을 많이 해야 하는 것도 그렇고 생각을 정리하는 데도 도움이 되는 것 같아."
<대통의 글쓰기> <나는 말하듯이 쓴다>를 집필한 강원국 작가는 '말과 글은 한 쌍'이라며 "잘 쓰려면 잘 말해야 하고, 말을 잘하려면 잘 써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물론 이에 대해 완전히 동의하기 어렵다고 느끼는 분도 있을 겁니다. 주변에 말은 번지르르 청산유수인데 정작 글 쓰기가 안 되는 이도 분명 있으니까요. 그런데, 강원국 작가의 말에서 '말 잘한다'는 것이 유창한 '말 발'을 뜻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실제로 말을 잘하는 것 같지만 잘 들어보면 핵심이나 알맹이 없이 그저 기술적으로 유창하게 들리는 경우도 있고, 특별히 말을 잘한다고 느끼지 못하지만 그 문장과 내용이 강렬하거나 마음 속에 오래 남는 경우도 있습니다. '말발'도 좋고 내용까지 좋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오히려 후자의 측면이 '잘 말한다'에 더 적합하다고 할 수 있죠.
토론과 글쓰기의 관계도 이러한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장에 반박에 재반박을 거침없이 이어나가며 화려하게 '말발'을 펼치는 토론의 기술 만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논제에 대해 생각하고 그 생각을 정리해서 자기 의견으로 잘 표현할 줄 아는 토론 교육을 받아야 제대로 잘 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토론할 때의 말발이 그대로 '글발'로 이어진다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고요.)
모든 수업에서 토론 방식을 통해 학습하는 독일 교육을 받은 아이들이 다른 아이들에 비해 월등히 글을 잘 쓰는지 어떤지는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자신의 생각, 상상, 의견 등을 적잖은 분량의 글로 써내야 하는 시험(그리고 숙제)을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통해 성장하고 있는 것을 보면 쓰기는 '글로 하는' 또 다른 토론 교육이라는 생각이 더 굳건해지는 게 사실입니다.
제가 토론 수업을 하고 있는 친구들과 하는 후속 활동 중 하나가 쓰기인데, 주로 그날 했던 토론을 정리하는 글을 써오거나 아니면 부모님들과 해당 주제로 이야기를 나눈 후 글을 써오게 합니다. 글쓰기가 익숙한 친구들도 토론을 정리하는 글을 써오라고 하면 일단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래도 '논리적인' 글 쓰기가 더 어렵게 느껴지는 탓입니다. 그럴 때마다 제가 하는 말이 있습니다. '글로 쓰는 토론'이라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했던 토론을 순서대로 떠올려봐. 처음엔 어떤 논제를 다룰지에 대해 소개했고 그 다음엔 너희들이 찬성과 반대로 번갈아 가면서 다양한 의견을 냈잖아? 그리고 마지막에 '진짜' 너희들의 의견은 무엇인지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지? 그 흐름을 생각하면서 오늘 했던 토론 그대로 말이 아닌 '글'로 표현한다고 생각하면 어렵지 않을 거야. 실제로 토론하는 것처럼 말로 해보면서 쓰는 것도 좋아!"
글 쓰기가 상대적으로 더 어렵게 느껴지는 초등학교 4학년 친구들에게는 '일기' 형식을 빌어서 토론을 써오게 하기도 합니다. 일기는 나를 중심으로 편하게 쓰는 글이기 때문에 '부모님과의 짧은 토론'을 일기로 써오라고 하면 아이들은 부담을 덜 느끼거든요. "엄마 아빠와 ~~~에 대해서 토론을 했다"로 시작해서 부모님 각자의 의견과 아이의 의견, 그 상황에서 벌어지기도 하는 동의 혹은 반대, 그리고 그 토론 활동을 통해 아이가 느낀 점까지 쓰는 '토론 일기'는 분량은 짧지만 그 자체로 토론의 ABC를 따르고 있고, 또 가족 토론 기록이 돼주는 '의미'까지 더해지죠.
글을 쓰는 능력은 정말 중요합니다. 토론은 언감생심 어렵다고 느끼는 부모님들도 '엄마표 글쓰기'는 직접 하는 분들이 제법 많습니다. 그런데 토론과 글쓰기는 완전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토론'을 그냥 '말하기'라고 생각해 보세요. 자기 생각, 의견을 말하는 행위가 토론의 가장 기본이고 시작입니다. 똑같은 일상 속 언어를 반복해서 말하기가 아니라 어떤 주제가 주어진 '말하기'라는 게 차이일 뿐이죠.
토론과 글 쓰기가 함께 이뤄질 때 둘 다 더 큰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어떤 게 먼저다, 라고 말하긴 어렵습니다. 그러나 일단 쓰는 것을 어려워 하는 친구라면 먼저 '말하기(토론)' 활동을 하고 '말했던 그대로' 써보는 훈련을 하는 게 쉽게 느껴질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