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급' 제도 존재하는 독일 교육 시스템, '자발적' 유급은 전략적 선택?
독일 교육 시스템에는 성적 미달로 인한 '유급' 제도가 존재합니다. 더불어 스스로 1년을 더 다니거나 학년을 낮추는 '자발적 유급' 사례도 종종 있는데요, 각자의 다른 학습 속도가 다를 수 있다는 인식에 기반한 것으로 긍정적 측면이 강합니다.
얼마 전 뉴스를 통해 노르웨이 남성평등위원회가 정부에 "남자 아이들을 초등학교에 1년 늦게 입학시키자"고 제안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노르웨이 남성평등위원회는 남아와 여아의 연령 별 발달 속도가 다르다는 점을 고려해 나중까지 이어지는 격차를 줄이기 위해 더 많은 이들이 '입학 유예'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성별에 따른 발달 차이는 학교 적응력, 성적, 성취도 등의 차이로 이어지고 이 격차는 다시 양성 불평등과 갈등으로 이어지는 만큼 입학 유예 뿐만 아니라 교육 과정 등의 변화 등 해법을 찾아야 한다는 겁니다. '남성 불평등'을 전제로 한 이런 주장에 대해 거센 비판은 물론 뜨거운 논쟁이 일고 있는데요, 개인적으로는 이 뉴스를 접하며 성별에 따른 차이가 아닌 '개인의 속도'에 따른 유연함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연장선에서 떠오른 게 독일 교육 시스템의 유급 제도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자발적 유급'이죠. 자발적 유급이란 말 그대로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 한 학년을 다시 다니기로 결정하는 것으로, 아주 많은 경우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드문 것도 아닙니다. 실제로 독일학교 8학년인 우리집 아이는 같은 반 친구 중에 다양한 연령대의 아이들이 섞여 있는데요, 두 명의 친구가 자발적 유급으로 학년을 낮춘 사례입니다. 물론 두 친구 모두 다른 학교(다른 나라의 독일학교)에서 전학을 오면서 학년을 낮춘 것으로, 같은 학교에서 같은 학년을 한 번 더 다니기로 한 경우와는 상황이 좀 다르긴 합니다만, 아이의 반 친구들은 두 아이가 한 학년 높은 나이라는 점에 대해 아무도 개의치 않습니다. 독일 교육에서는 성적 등 기준이 충족할 경우 한 학년을 건너 뛰는 '월반'도 가능한데, 마찬가지로 필요하다면 한 학년을 다시 다니는 것도 문제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독일 학교의 유급 시스템에 대해 알아볼까요?
독일 교육의 유급 시스템은 전통적으로 꽤 중요한 제도였다고 합니다. 독일어로 유급은 '그대로 앉아있는다'는 의미의 'Sitzenbleiben'인데요, 학습 능력에 따라 자리에 앉아 있다가 성적을 성취하면 앞 자리로 이동하고, 그렇지 못하면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앉아있어야 했던 과거의 학습 방식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해요. 앞서 말했던 자발적 유급과 달리 성적 미달로 인한 비자발적 유급인 것이죠. 하지만 사회적 인식은 우리의 그것과는 좀 다른 측면이 분명 있습니다. 학생이나 학부모 입장에서는 결코 유쾌한 경험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단히 좌절하거나 낙인이 찍히는 사안도 아닌 거죠. 물론 유급을 통보 받는 당사자가 느낄 자존감 하락이나 심리적 부담 또한 존재하겠지만, 적어도 사회 전반적 인식이 '유급=실패, 낙오'는 아니라는 겁니다. 유급에 대한 이런 인식 차로 인해, 필요하다고 판단될 때 '자발적 유급'을 택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고요.
성적 유급의 기준은 주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요, 보통 초등학교인 '그룬트술레'(1~4학년, 또는 5학년)에서는 유급이 없고, 중등 과정 이상부터 성적에 따른 유급 기준이 존재합니다. 특히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한 '김나지움'에서는 성적 등급 1~6 중 5 이하인 과목이 2개 이상 있을 경우 유급되는 게 일반적인데요, 김나지움 최고 학년이자 대학 입학 자격 시험인 '아비투어(Abitur)'에 내신이 반영되는 11-12학년은 유급이 없습니다. 다만, 12학년에서 아비투어에 불합격해 대학 진학을 못하게 된 경우 12학년을 다시 다니게 됩니다.
통계적으로 보면 독일 교육에서 성적 미달로 유급하는 사례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합니다. 일부 과목이 미달인데 전 학년을 다시 다녀야 하는 것이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 지출이라는 비판과 함께 학생들의 자존감과 정서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는 의견도 있기 때문인데요, 그런 이유로 많은 주들이 유급을 최소화하거나 방과 후 보충 학습, 선후배 멘토링(학습 코칭) 등을 통해 부족한 공부를 지원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습니다.
'성적보다 아이의 발달 속도 중요', 자발적 유급은 전략적 선택?
그러나 자발적 유급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긍정적 측면이 강합니다. 교사와 부모 모두 개인의 학습 속도는 다를 수 있고 '성적보다 아이의 발달 속도가 중요하다'는 관점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넘어가는 시기에는 기초를 튼튼히 다져 중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한 목적으로 학교와 논의 후 자발적 유급을 택하기도 하고, 대학 입학 자격 시험인 아비투어의 본격적 시작이라 할 수 있는 11학년에 진급하기 전 10학년을 한 번 더 다니는 선택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특히 김나지움 학생의 경우 성적이 지원하려고 하는 대학(특히 의대나 법대 등 인기 학과)의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될 때 10학년을 반복한 후 성적을 끌어올려 11학년으로 진학하고자 하는 전략적 결정을 하는 사례들이 적지 않죠. 또 직업 학교 진학을 목표로 했다가 대학 진학 쪽으로 진로를 바꾸어 상급반으로 복귀할 때 역시 자발적 유급을 통해 부족한 학습 공백을 메우는 사례도 있는데요, 유연한 진로 전환에 도움이 되는 측면이 크기 때문에 이런 결정 또한 오히려 책임감 있는 태도로 인정받곤 합니다.
아이가 다니고 있는 학교에서도 학년 말이나 학기 초가 되면 몇 학년 아무개가 한 학년을 낮춰서 들어왔다느니, 11학년 진학 앞두고 10학년 한 번 더 다닌다느니 하는 등의 이야기가 들려오곤 합니다. 구성원이 워낙 적은 소규모 학교라 학부모도 학생들도 대부분 서로의 면면을 파악하고 있는데, 그 누구도 그런 상황을 이상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필요하면 그럴 수 있고, 설령 그것이 성적 미달로 인한 유급이라 하더라도 1년 더 꼼꼼하게 부족한 학습을 보충해서 진학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좋은 방식이라는 데 모두 동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성적이나 성취 문제의 성별 차이에 따른 '남아 1년 학교 입학 유예'가 아니라, 모든 아이들의 개인적 발달 속도, 학습 속도의 차이를 인정하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봅니다. 갈수록 더 '빠른' 선행 학습이 이뤄져 7세 고시를 넘어 4세 고시까지 '성행'한다는 우리나라의 교육 현실을 생각할 때 이런 생각이 매우 비현실적인 꿈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긴 인생을 놓고 볼 때 그 시절 1~2년 늦는 것이 그리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요. 자신만의 속도로 자라는 아이들이 각자의 성장과 성취, 학습 속도에 맞춰 배우고 자란다면 지금보다 좀 더 행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기 위해선 결국 어른들의 생각과 시선이 먼저 바뀌어야 하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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