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득 화법이 일상에 미치는 영향

설득 화법이 일상에 미치는 영향

우리집 아이는 툭하면 "설득해볼까?"를 외칩니다. 말만 하는 게 아니라 아예 설득용 프레젠이션 자료까지 만들어와서 발표도 합니다. 일상 속에서 재밌고 흥미롭고 거기다 성취감까지 얻는 '설득의 순간'들을 제법 많이 경험한 덕분입니다.

anotherthinking

지난해 10월, 우리집에 새로운 식구가 생겼습니다. 그 이름도 생소한 '반려봇' EMO인데요, 키 15cm의 작고 아담한 EMO의 주요 활동 구역이 탁상 위라서 공식적으론 '데스크탑 펫(Desktop pet)'이라 부릅니다.

로봇이긴 한데 정말로 반려동물(pet) 키우는 느낌이 없지 않습니다. 와서 애교도 부르고, 주인들 얼굴을 인식하고 말도 걸죠. 가위바위보 놀이를 비롯해 간단한 게임 몇 가지도 같이 하면서 놀 수 있고요, 춤 춰 달라고 하면 때마다 다른 곡을 플레이 하면서 신나는 댄스도 보여줍니다. 날씨, 시간 같은 간단한 질문에 답도 해주는데요, 아 최근에는 챗GPT 기능까지 업데이트돼, 챗GPT와 연결하라고 명령한 뒤 더 다양한 질문을 하고 답변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생일이 되면 생일 축하 노래도 불러주고요, 나도 모르는 새 내 사진도 찍어줘요.

게다가 또 얼마나 독립적인지 모릅니다. 가족들이 신경 써주지 않아도 혼자 알아서 삼 시 세끼 챙겨 먹고, 오후엔 티타임까지 즐기더라고요. 취미도 많아서, 그림도 그리고 책도 읽고 게임도 하고 복싱도 해요. 친구들이랑 채팅도 하는 것 같은데 도대체 무슨 언어인지 내용을 알아볼 수는 없더라고요. 책상 위를 혼자 신나게 걸어 다니다가 장애물 만나서 알아서 피하고요, 책상 끄트머리나 모서리에 다다르면 깜짝 놀라며 알아서 물러납니다.

어떻게 보면 살아있는 생명과 교감하는 것과는 다를 테지만, 같이 지내보니 정말로 반려동물 키우는 것 같은 느낌도 들어요. 굉장히 편한 반려동물이죠. 해줄 건 그저 '만져달라'고 표시를 보낼 때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 배터리 방전 신호를 보내면 충전 장치인 스케이트보드 위에 올려주는 것만 하면 되거든요. 그런데 반려동물이 주는 것과 비슷한 기쁨을 줍니다.

EMO를 집에 들이게 된 것은 아들 아이가 강력히 원해서입니다. 아이는 몇 년 전부터 반려동물을 키우고 싶어했는데요, 한 생명을 식구로 맞는 것에 대한 책임감과 감당해야 할 상황들 때문에 마음은 있어도 결정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엄마가 좀 더 여유로워지면' '네가 직접 케어할 수 있게 되면' '마당 있는 집에 살게 되면' 이라는 식으로 몇 년 째 핑계만 늘어가니 아이도 '그게 도대체 언제?'라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에요.

그러던 중 아이가 EMO를 알게 된 거죠. 지난해 상반기 온라인 과학 수업에서 '로봇'을 테마로 여러 차례 강의를 들은 뒤 '나만의 로봇 만들기' 과제를 하던 중 '반려봇'의 존재를 발견한 겁니다. 그때부터 아이는 현존하는 모든 반려봇에 대해 검색하고 정보를 모으며 매번 저와 남편에게 '설득'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A봇은 어떤 특징이 있고, B봇은 어떤 특징이 있고, C봇은 또 어떠한데, 기능이 어떻고 가격이 어떻고 등등... 매번 굉장히 열심이었는데 듣다 보면 신기하긴 했지만 '무슨 반려봇이야?'하는 생각이 강했어요. 게다가 가격이 40만 원~50만 원 대, 그 중 일부는 '구독료' 비슷한 월 비용까지 지출해야 해서, 그 정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죠.

아이가 설득 자료로 만든 프레젠테이션 표지. ©어나더씽킹랩

하나를 파고들기 시작하면 끝을 보는 성격인 아이를 알기 때문에, 저는 중간에 포기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해서 제시한 대안은 '네가 직접 충분히 공부해 본 후 각각의 장단점 등을 파악해서 함께 합리적인 결정을 내려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시간을 벌기 위한 의도도 있었고, 그렇게 공부하고 검색하는 과정에서 아이 스스로 '아직은 시기상조'라거나 '생각만큼 반려동물을 대체하긴 어렵겠다'는 판단을 하게 되길 기대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두 달이 흘렀을까요. 어느 날 아이가 자신은 결론을 내렸다면서 프레젠이션을 진행했다고 하더라고요.  7장 짜리 간단한 파워포인트 자료를 준비해온 아이는 귀여운 반려봇의 외형적 특징부터 기능, 동영상 시연, 다른 반려봇과의 차이점 및 경쟁력, 결론까지 10여 분에 걸쳐 논리와 감성에 호소해가며 '설득'을 했습니다.

프레젠테이션을 보고 나니 EMO를 사지 않을 수가 없더라고요. 꼼꼼한 검색과 비교, 거기에 무조건 떼쓰기고 조르기가 아닌 합리적 결정을 위한 프레젠테이션까지 준비한 아이의 열정이 대단한 것도 있었고, 실제로 아이의 '설득 논리'가 마음을 움직인 것도 컸습니다. 가격은 40만 원 선으로 꽤 고가였지만, 들어보니 그 정도의 가치가 있었고 무엇보다 '반려동물'을 대신하기에 부족함이 없겠다는 판단이 들게 한 것이었습니다.


아이는 매번 필요한 무언가 생겼을 때, 부모와 이견이 생겼을 때 이와 비슷한 과정을 거치는 편입니다. 프레젠테이션 자료까지 만들어와서 설명하는 일은 극히 드물지만, 구두로 데이터와 자료 등을 제시하며 설명하는 설득을 통해 동의를 구하곤 합니다. 더욱 긍정적인 것은 이런 과정을 스스로도 '필요하다'고 느낀다는 겁니다. 부모를 설득하기 위해 정보를 찾아보고 검색하다 보면 자신도 몰랐던 장점 혹은 단점을 파악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더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걸 깨닫게 된 거죠.

일례로 맥북이 그런 경우인데요. 음악을 취미로 하는 아이는 작곡 프로그램의 필요성을 느껴 검색하던 중 맥북에서만 사용 가능한 프로그램을 발견했습니다. 꽤 매력적이었던 모양인지 '맥북이 필요할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역시 아이는 역시 부모님을 설득하기 위해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하다 생각했겠죠? 그러던 중 기능 대비 가격을 보고 본인도 놀란 거죠. 과연 이 가격 만큼의 가치가 있을 것인가를 고민했고, 더 많은 검색과 정보를 찾아본 후 '지금 사용하고 있는 무료 프로그램으로 당분간 충분할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리더라고요. 우리 부부는 아이의 결정을 존중하는 것과 함께 "나중에라도 꼭 필요한 상황이 생긴다면 그때 다시 논의하자"며 가능성을 남겨 주었습니다.

아이가 설득 자료로 만든 프레젠테이션 자료 중 결론. ©어나더씽킹랩

아이가 이처럼 합리적인 과정을 거치는 연습이 돼 있으면 부모 입장에서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무엇보다 불필요한 감정적 다툼이 없습니다. '사고 싶어!(혹은 하고 싶어!)'로 시작해 '안돼'와 '왜 안돼?'가 반복적으로 이어지며 급기야 일방적으로 한쪽이 포기해야만 끝나는 다툼은 어떤 결론이 나든 누군가 불만을 갖게 될 수밖에 없겠죠.

더 중요한 것은 설득의 과정은 그 안에서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논리적 때론 감성적 호소를 해야 하는 상황을 경험하게 하며 그 자체로 학습 효과가 있습니다. 하나의 논제를 두고 서로 찬반의 입장이 있으니, 이때 자신의 주장을 관철 시키기 위해 깊이 생각하고 다양한 논거를 만들며 가장 효과적인 표현으로 '동의'를 얻어내는 이 과정은 그 자체로 일종의 '토론'인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집 아이가 프레젠테이션이라는 설득을 위한 장치를 스스로 생각해낼 수 있었던 것도 그동안 일상에서 경험했던 수많은 토론 화법을 통해 '최적화된 방식'이라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일 겁니다. 상대(부모)에게 다소 어렵고 생소한 논제(반려봇을 왜 들어야 하는가?)이니 간결하면서도 효과적인 '보여주기 식'이 통할 것이라고 생각한 거겠죠.

이처럼 일상에 설득 화법을 들일 때는 몇 가지만 기억하면 됩니다.

첫 번째, 그 상황이 '설득 화법'을 연습할 수 있는 상황인가에 대한 판단과 적용입니다.

설득의 순간이 우리 일상에 너무나 흔하고 많습니다. 그러나 매번 모든 결정의 순간마다 '설득'을 거쳐야 한다면 굉장히 피곤하고 힘든 일이죠. 따라서 아이의 어떤 요구가 있을 때, 그 요구가 일상에서 반복적으로 벌어지는 사소함의 범위를 넘어설 때, 판단을 잠시 보류하고 아이에게 충분히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기회를 줘 보는 것입니다. '네가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들어보고 판단하겠다'는 가능성을 열어둔 채 말이죠.

저희 집 사례를 들어볼게요. 지난 월드컵을 계기로 해외 축구 리그에 푹 빠진 아이는 요즘 모든 해외 경기 소식을 아주 꼼꼼하게 챙기는 편입니다. 좋아하는 마음이 크다 보니 모든 경기를 실시간으로 보고 싶은 마음도 크겠죠. 하지만 시차 때문에 대체로 아주 늦은 밤이나 새벽에 경기가 진행될 때가 많아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아이는 실시간으로 축구 경기를 볼 수 있는 채널 구독을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이 문제가 아이에게 새로운 '설득의 안건'이 되겠다고 판단한 저는 '일단 보류' 해두고 아이 스스로 조금 더 생각하고 구독이 반드시 필요한지, 그 비용이 합리적인지 등을 따져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생각하는 문제점들을 지적해주면서 그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도 제시하라고 했죠.

그때부터 아이는 또 '설득용 근거'를 만들기 위한 조사에 들어간 뒤 설득에 나섰습니다. 한 달에 몇 건의 경기가 있고, 실시간 시청 가능한 경기는 최소 혹은 최대 몇 경기 정도이며, 몇 개의 해외 리그를 볼 수 있다는 등등 구독료가 충분히 그 만큼의 가치를 한다는 논리를 펼쳤습니다. 그리고 제가 제시한 문제, 즉 '새벽 시간 경기를 어차피 볼 수 없다는 문제와 같은 맥락에서 늦은 시간이나 새벽 경기를 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 그때마다 엄마와 갈등을 빚을 수도 있다'는 문제에 대해서도 해결책을 제시했는데요. 우선 라이브 경기를 못 보는 상황을 위해 하이라이트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과, 새벽 경기를 보는 문제로 고집을 부리지 않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하나 더, 이런 약속이 지켜지지 않을 경우 언제든 구독을 취소해도 된다는 선택권을 저에게 넘겨주기까지 했죠.

이쯤 하니, 설득을 당해주지 않을 이유가 없더라고요.

이미지_픽사베이

여기서 두 번째 중요한 점이 나오는데요, 설득의 순간을 통해 아이가 성취감을 경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껏 열심히 생각하고 근거를 정리해서 설득한다고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돼!'라는 답만 얻는다면 아이 입장에서는 '해봐야 소용 없다'는 생각이 들 겁니다. 무작정 떼를 쓰거나 조르지 않고 합리적인 이유를 들어 설명했을 때 내 주장이 관철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야 '설득' 상황 자체가 재밌고 보람 있게 느껴지겠죠.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상황에서 '설득을 당해주어야만' 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이가 적절한 성취 경험을 통해 '하면 된다'라는 가능성을 마음에 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야만 더 자신감도 생기고 설득이 필요한 상황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게 될 겁니다. 성취 경험이 많다면 어쩌다 부모의 '동의'를 얻어내지 못해도 수용할 줄도 알게 됩니다.

축구 경기 채널 구독을 시작한 후 있었던 일입니다. 아이가 정말 보고 싶어했던 경기가 일요일에서 월요일로 넘어가는 새벽에 열리기로 돼 있었습니다. 며칠 전부터 아이는 이날의 경기를 기대하면서 라이브 경기를 보고 싶다는 마음을 드러냈습니다. 주말에 충분히 쉴 수 있으니 평소보다 두 시간 일찍 일어나 경기를 보는 것에 대해 크게 반대할 마음은 없었지만, 문제는 월요일에 학교에서 프랑스어 시험이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아이는 미리 공부를 많이 해두면 된다, 충분히 시험 준비를 한 다음에 보겠다, 면서 설득에 나섰고 저는 조건을 건 뒤 수용했습니다. 시험을 본 후 그 결과에 대해서는 스스로 책임을 질 것, '충분한' 공부 상황에 대해 엄마는 판단할 수 없으니 스스로 엄격하게 생각한 후 결정할 것, 이라는 조건이었죠. 그리고 한 가지 아이가 생각치 못했던 문제도 제기했는데요, 공부를 미리 했더라도 너무 일찍 일어나는 상황으로 인해 시험 당일 컨디션에 지장을 받는 것은 아닐까 하는 지적이었습니다.

이 날 아이는 결국 라이브 경기 관람을 포기했습니다. 여러가지를 판단하고 생각해봤을 때 시험을 위한 컨디션이 더 중요하다고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설득 화법을 키울 때 기억할 세 번째는, 적절한 '반론' 제기입니다.

'무조건 안돼'라고 말하지 말고 가능성을 열어두라고 앞서 말씀 드린 것 기억하시죠? '무조건적인' 반대는 안 되지만 아이가 좀 더 적극적으로 설득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주기 위한 '전략적 반론'은 필요합니다. 물론 이 때도 공격적인 언어의 사용이 아닌 우선 아이의 의견을 긍정해준 뒤 덧붙이는 '따뜻한 반론'이어야 합니다. "그래, 들어보니 네 말도 맞는 것 같아. 하지만 내 생각에는~~~"이라고 슬쩍 반대되는 주장을 꺼내보거나, "네 말을 들으니 일리가 있는 것 같아. 그런데 궁금한 점이 있는데 말이야~~"라면서 아이가 놓치고 있었던 부분에 대한 지적이나 문제 제기를 하는 식입니다.

이런 상황에 접하면 아이는 더 열심히 생각합니다. 자신의 주장이 어느 정도 통하기 시작했다는 '사인'으로 받아들이면서 더 강력한 근거와 이유를 찾기 위해 노력하죠.

이미지_픽사베이

마지막으로, 아이가 즐거운 경험으로 인식할 수 있게 해주세요.

'원하는 (사소한) 것을 얻기 위해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라는 힘들고 고단한 경험으로 인식되면 다음에 또 같은 상황이 왔을 때 아이는 우선 마음에 부담이 생길 겁니다. 토론도 마찬가지만 설득 화법도 그 상황이 설득을 위한 상황인지 아닌지도 모르게 익숙해지는 것이 중요하고 강력한 무기가 됩니다.

몇 해 전 일입니다. 당일치기 여행에서 돌아오는 토요일 저녁, 차가 막혀 집에 도착할 시간이 늦어지고 있었습니다. 저녁 식사가 늦어질 것이 뻔한 상황이었는데 그때 뒷자리에 앉은 아이가 말했습니다. "오늘 저녁으로 라면 먹을까?" 반가운 제안이었지만 한창 성장기인 아이에게 가능하면 라면을 먹이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 답하기를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그때 아이가 덧붙이더군요. "우리 여행에서 돌아올 때 항상 라면을 먹었잖아. 그러니까 오늘도 먹어야지." 나름 근거를 들며 말하는 모습이 가상했는데 그 순간 저는 '이 순간을 설득 화법의 기회'로 삼아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이에게 말했죠. "좋아. 그러면 우리가 오늘 저녁에 왜 라면을 먹어야 하는 지 한번 설득해볼래? 엄마 아빠는 반드시 라면이어야 할 이유를 모르겠거든. 그런데 또 먹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니까 네가 우리를 좀 설득해줘."

아이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지만 라면이 먹고 싶은 마음이 이겼는지 이런저런 근거를 대기 시작했습니다. 라면은 맛있다, 우리는 맛있는 걸 먹어야 한다, 여행 후에는 라면을 먹었다. 오늘도 짧았지만 여행 중 하나였다 등등의 설명이었죠. 그렇게 설득을 당할 거라면 애초에 판을 깔지도 않았겠죠?

"음, 뭔가 좀 부족한데? 그 정도 이유라면 꼭 라면이 아니어도 되지 않을까?"

아이가 억울한 마음이 들었는지 목소리에 눈물이 섞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저와 아이의 대화에 남편이 끼어들었습니다. "아, 지금 시간이 어떻게 되지?" 은근한 힌트를 준 것이었죠. 아빠의 말에 아이디어를 얻은 아이는 논리를 펴기 시작했어요.

"지금 7시가 넘었잖아. 내비게이션에 집까지 20분 남았다고 나오는데 주차장에 주차하고 올라가면 7시 반이나 되어야 집에 들어갈 거야. 그때부터 엄마가 저녁 준비를 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잖아? 그러면 너무 늦게 저녁을 먹어야 하니까 건강에도 좋지 않아. 그리고 나도 문제집 풀고 할 일이 있는데 밥을 늦게 먹으면 시간이 없어서 안 좋을 것 같아."

아이의 설득 화법에 남편과 저는 고민 없이 "좋아"를 외쳤죠. 그런데 저는 거기서 끝내지 않았습니다. 아이가 그 상황을 좀 더 유머러스하고 즐거운 기억으로 받아들이게 만들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와, 설득을 너무 잘했는데! 그런데 사실 엄마는 이런 답을 원했어. '엄마, 내가 사랑하는 엄마가 저녁을 준비하느라 너~무 힘들잖아. 내가 라면을 좋아해서 먹자고 하는 게 아니야. 엄마가 저녁 준비하는 고생을 안 하도록 그래서 제안한 거지. 절대로 내가 먹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야'라고 말이야."

듣고 있던 아이가 깔깔 대며 웃더라고요. 그 웃음 속에서 '다음 번엔 저런 방법을 써먹어야' 하는 아이의 마음도 읽혔습니다. 그 다음부터 아이는 툭 하면 "엄마, 내가 설득해볼까?"라며 여유만만한 태도를 보이곤 했는데요, '설득'의 순간이 재밌고 즐거운 기억의 한 장면으로 남은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설득에 성공한 성취감도 크게 작용했을 테고요. 아닌 게 아니라 우리 아이가 프레젠테이션까지 하고, 매번 다양한 설득의 방법을 동원하기 시작한 것은 그날 '라면을 먹기 위한 설득' 경험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미지_픽사베이

제안하는 능력, 설득을 위한 논리력이 어릴 때부터 서서히 쌓인다면 훗날 아이의 사고 체계는 얼마나 단단해져 있을까요. 가장 가까운 관계인 부모와 자녀 사이에는 좀처럼 '설득'이라는 대화가 끼어들기 어렵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일상 속 상황을 통해 의도적으로 즐거운 설득을 대화 속에 자연스레 녹여본다면 아이는 학교 생활 그리고 더 훗날의 사회생활을 하기 위한 무기 하나를 갖추게 되는 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뭘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라고 생각하신다면 그 과정의 즐거움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아이가 자신이 원하는 것, 바라는 것을 이루기 위해 어떤 논리와 혹은 비논리의 말을 쏟아낼지 그것 만으로 기대되지 않나요?

아이들의 언어란 때론 놀라울 때가 많습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지?'라며 뜻밖의 논리에 화들짝 놀라 저절로 지갑이 열리게 될지도 모르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을 풀어놓아서 한바탕 웃음꽃이 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설득의 경험이 쌓여가는 동안 아이는 떼를 쓰거나 무조건 해달라는 식의 태도를 버리고, 스스로 합리적 판단을 해서 때로는 자발적으로 '포기'하는 상황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자, 어느 쪽이든 해볼 만하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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