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학교의 역사 시간은 어떻게 '생각하는 법'을 가르칠까
초등학교 5학년 2학기에 본격 시작되는 우리나라 역사 교육. 독일 역시 5학년 때 역사를 배우기 시작하는데요, 그 방식은 우리나라와 매우 다릅니다. 토론을 바탕에 두고 질문하고 생각하고 스스로 답을 찾아나가는 방식으로 이뤄집니다.
지난 3월, 역사 관련한 논제로 토론 수업을 몇 차례 진행하면서 아이들에게 역사를 좋아하는지 공통적으로 물었습니다. 답변은 대체로 비슷했는데요, "역사 자체는 싫지 않은데 과목은 싫다" 였습니다. 그 이유는 너무 많은 것을 암기해야 해서 재미 없다는 것이었죠. 답변 중에는 이런 내용도 있었습니다. "역사가 중요하다는 것은 알겠는데, 왜 배워야 하는지 모르겠다." 어릴 때 역사를 이야기 책을 통해 재밌고 흥미로운 스토리로 접했던 아이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야기로서의 역사와 과목으로서의 역사가 완전히 분리돼 있었죠.
돌아보니 제 경우도 비슷했습니다. 학교 다닐 때 역사는 그저 암기 과목이었고, 공부하는 만큼 성적이 나오는, 그다지 어려운 과목은 아니었지만 역사에 대한 관심과 흥미는 갈수록 떨어뜨리는 방식이었죠. 물론 그때 배운 지식이 어떻게든 남아 있겠으나 기억나는 것이라곤 칠판 가득 선생님이 써주신 '요약, 정리'를 노트에 옮겨 적고 시험 때마다 밑줄 그어가며 공부했던 장면들이 대부분입니다.
오히려 어른이 된 후 역사에 대한 흥미가 깊어졌는데요, 다시 책과 다양한 형태의 강의 등을 통해 접하게 되면서 역사는 그저 사실이나 지식이 아닌, 무수히 많은 생각과 철학적 사고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더욱 좋아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더 궁금한 내용은 스스로 찾아보게 되는 자발적 공부로 이어지게 됐고요. 그럴 때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요. 어릴 때 이런 방식으로 역사를 접하고 공부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요. 어른들이 선생님들이 왜 역사가 중요한지, 역사 공부를 해야 하는지 그 중요성을 설파하지 않아도 스스로 알게 됐을 텐데 말이죠.
한국 교육 과정에서 본격적으로 역사가 등장하는 학년은 5학년이라고 합니다. (3학년 때 사회 과목에 석기 시대가 나오긴 하지만 역사라기보다는 '시대마다 다른 삶의 모습'으로서 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 등이 등장합니다.) 5학년 2학기 사회 과목을 통해서인데요, 이때 고조선부터 근현대사에 이르기까지 무려 70만 년 가까운 우리나라 역사 전체를 다룬다고 해요. 4~5개월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그렇게 방대한 시기를 다루다 보니 아이들에게 역사란 재미 없고 어려운 과목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는 것이죠.
독일 교육에서는 역사를 어떻게 가르치고 배울까요. 먼저 몇 가지 핵심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독일에서 역사 시간은 토론이 가장 활발한 과목 중 하나입니다.
특히 근현대사를 다루기 시작하는 김나지움 고학년이 되면서부터 역사적 사실은 재료가 될 뿐 토론의 과정을 거쳐 학습하는 방식이 주를 이루죠. 이는 '보이텔스바흐 (Beutelsbach) 협약'에 따른 것인데요. 이 협약은 1976년 당시 분단 국가였던 독일의 소도시 보이텔스바흐에 독일의 교육자, 정치가, 학자, 시민사회단체 등이 모여 치열한 토론을 벌인 끝에 마련한 교육 기준으로, 교사의 일방적 주입이 금지되고 학생 스스로 다양한 논쟁과 경험, 비판적 자세 등을 통해 독립적 판단을 하도록 돕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현재는 독일 모든 공교육의 기본 가치가 됐지만 협약이 이뤄진 당시에 '정치 역사 교육'을 위한 기본 원칙이었던 것을 상기하면 독일 학교에서 역사 시간에 왜 토론이 주를 이루는지 더욱 이해가 되죠. (*보이텔스바흐협약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독일교육 랩>에서 이미 발행했던 '독일 토론 교육은 어떻게 시작되었나'를 참고하세요.)
둘째, 독일에서 역사 교육은 역사적 사실이나 지식이 아닌 역사적 사고를 그 핵심에 두고 있습니다.
이는 토론이라는 역사 교육의 기본 원칙과도 연결되는 부분입니다. 어떤 시대에 어떤 일이 있었고 어떤 인물이 있었는지에 대한 내용 습득이 핵심이 아니라, 그 내용을 분석하고 숙고하고 또 질문을 던지면서 비판적 역사 인식을 개발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도 교사가 일방적으로 알려주는 방식이 아니라 스스로 다양한 사료를 찾고 진위를 확인하고 체계적으로 정리 및 발표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이를 통해 다양한 관점에서 생각하고 서로 서로 질문과 평가가 이뤄질 수 있도록 이끌죠.
셋째, 질문하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역사적 사고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바로 질문을 통해서 이뤄지는데요, 가설을 세우고 생각해보는 방식이 대표적입니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고들 하지만, '만약에'라는 단서를 달고 질문을 해보는 것이죠. 우리나라 역사 교육이 질문이 아닌 '정답'을 찾는 방향으로 돼 있는 것과 매우 다른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넷째, 연대순으로 배우되 현대사를 반복 심화합니다.
우리나라 역사 교육은 '반복'이 많습니다. 초등학교 때 배운 시기를 중학교, 고등학교 때 다시 배우는 식이죠. 물론 그 테마도 깊이도 달라지긴 하지만, 계속된 반복이 흥미를 떨어뜨릴 수도 있겠죠.
독일 학교 체계는 5학년부터 중등 교육이 시작되는데, 이때 역사 교육이 시작되고 연대순으로 배웁니다. 인류의 기원부터 고대 그리스 -로마 -> 중세 유럽 -> 근대 -> 프랑스 혁명 -> 제국주의와 1차 세계 대전 -> 2차 세계 대전 등 시대순에 따르며 전 시대를 학습하게 됩니다. 독일 학교는 보통 '5/6학년', '7/8학년' 등 2개 학년씩을 묶어서 하나의 군으로 분류하는데요, 11/12학년 군이 되면 현대사를 반복 심화하면서 가장 활발하고 깊이 있는 토론이 이뤄집니다. 특히 제국주의와 나치, 2차 세계대전 등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토론하게 되는데요, 이는 과거 역사에 대한 반성과 사죄, 같은 실수를 절대 반복해서는 안된다는 독일 사회의 뿌리 깊은 의식이 작용한 것이기도 합니다.
위에서 정리한 몇 가지 핵심은 독일 교육에 대한 연구 자료 및 독일 거주 당시 김나지움 졸업생들을 인터뷰했던 결과를 토대로 한 것입니다만, 실제로 현재 독일 학교 6학년 과정을 배우고 있는 우리집 아이를 통해서도 증명됩니다. 5학년부터 학교 과정에 역사 과목이 포함되었는데요, 5학년 때는 역사라는 과목과의 첫 만남 정도였다면 6학년 들어서면서부터 본격적인 역사 교육이 시작된 느낌입니다. 5/6학년 군에서는 토론이 활발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고학년이 되어서 토론을 진행해야 할 때를 대비해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확립해나가는 교육이 이뤄지고 있죠.
6학년 과정을 중심으로 독일 학교에서 역사 교육이 이뤄지는 방식을 구체적으로 얘기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다만, 독일은 주마다 교육 과정이 조금씩 다르고 구체적 방식 또한 교사마다 다르기 때문에 보편적인 방식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독일 역사 교육의 핵심이 반영된 것임은 분명합니다.)
첫째, 자체 포트폴리오 제작
특정 시대에 대한 주요 테마를 몇 가지로 정리하고 각 테마별 사료를 찾아 정리 및 기술하는 방식의 '자신만의 역사 포트폴리오'를 제작하는 교육이 이뤄졌습니다. 이때 테마는 모든 학생이 공통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기본 테마 몇 가지에 학생 개개인의 관심사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테마가 추가되었죠.
흥미로운 부분은 포트폴리오의 마지막이 '부모님의 평가와 피드백'이란 점이었습니다. 아이가 제작한 포트폴리오에 대해 가장 눈에 띄는 점, 좋았던 부분, 개선이 필요한 부분 등에 의견을 남기는 것인데요, 이를 위해서는 아이가 부모에게 자신의 포트폴리오에 대해 '설명'하는 시간이 반드시 있어야 하기 때문에 단순히 부모 참여를 유도하기 위함이라기 보다는 제작한 내용에 대한 종합적 이해 등을 한번 더 확인하기 위한 방편으로 보입니다.
둘째, 협업을 통한 프로젝트 수행 및 발표
교과서에서 제시된 문제에 답을 찾고 그 답에 대해 프레젠테이션을 만드는 방식이 자주 활용됩니다. 이 때도 해당 이슈에 대해 목차를 세우고 자료를 찾아 정리하는 과정이 기본으로 포함되는데요, 마지막에는 의견을 제시하는 것까지 수행해야 합니다. 포트폴리오가 각자 하는 과제였다면 프레젠테이션을 제작하고 발표하는 프로젝트는 대체로 협업으로 이뤄집니다. 협업의 과정을 통해 서로 시너지를 발휘하고 더 나은 결과물을 내기 위한 경험까지 꾸준히 해볼 수 있는 것이죠.
프레젠테이션 발표 후에는 다른 친구들의 결과물에 대해 질문하거나 피드백을 주는 시간을 갖는데요, 이 또한 경청하고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는 토론식 수업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셋째, 역사적 가설 등 질문과 생각
교과서에 제시되는 질문들 중에는 역사적 가설을 세우는 질문들이 있습니다. 가령 최근 아이가 제작한 프레젠테이션의 주제는 '로마 vs 카르타고' 였는데, 이는 '한니발이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했다면 어떻게 됐을까?'라는 역사적 가설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밖에도 교과서에는 다양한 질문들이 제시되고 학생들은 그 질문들을 따라가며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 역사적 지식을 배우는 것만이 아닌 역사적 사고를 거듭하게 됩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시저는 어떻게 독재자가 됐을까?'와 같은 질문이죠. 재밌는 건 아이가 배우고 있는 6학년 역사 교과서에는 질문이 두 가지 코스로 제시돼 각자 선택할 수 있게 돼 있는데요, 몇 개의 공통 질문을 포함해 하나는 쉬운 질문, 또 하나는 어려운 질문으로 된 코스로 나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쉬운' 코스를 택할 것이라고 짐작했는데 아이의 답변에 따르면 대부분의 학생들이 '어려운 질문' 코스를 택한다고 하네요. 아이는 그 이유에 대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자존심 때문'이라고 했는데, 어려운 질문 코스가 좀 더 흥미롭다는 부연 설명을 붙이더군요.
넷째, 통합적, 분석적, 비판적 사고의 함양
위에서 제시한 모든 학습 과정이 통합적, 분석적, 비판적 사고를 기르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체를 파악하는 능력, 자료를 찾고 검증하는 능력, 정리하고 의견을 기술하는 과정에서 길러지는 분석 능력, 서로에게 질문하고 피드백을 주는 과정을 통한 비판적 사고 능력 등, 역사 과목 자체가 깊이 생각하고 올바른 가치와 시각을 만들어가는 훌륭한 학습이 되는 것입니다.
시험 또한 이러한 능력을 판단하기 위한 문제가 제시됩니다. 여러 번 말했듯이 독일 학교의 시험은 모두 서술형인데요, 역사 시험에는 단순히 사실 만을 나열하는 문제가 아니라, 반드시 분석하고 비판하고 의견을 드러내야만 합니다. 일례로 아이가 최근 치른 역사 시험에서는 로마 건립에 관한 두 가지 전설을 제시한 뒤 그 두 가지를 비교해서 쓰라는 문제가 나왔다고 합니다. 사실(지식)과 분석, 비판, 의견이 종합적으로 답변에 들어가 있어야 하는 것이죠.
우리집 아이는 독일 역사 시간의 장점을 하나만 꼽아보라는 저의 질문에 대해 "프레젠테이션 같은 프로젝트 방식으로 직접 만들어가는 수업이 재미있다"고 답했습니다. 역시 일방적이고 주입식 교육이 아닌 스스로 답을 찾아가는 주도적인 방식일 때 교육의 효과는 물론 흥미 유발도 가능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대답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