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공부를 단 하루 시험으로 평가하다니 가혹하지 않나요?" 독일 아비투어로 돌아본 우리나라의 수능
언젠가 독일 친구가 BBC에 소개된 우리나라의 대학수학능력 시험 당일 풍경 기사를 보여주며 "이게 사실이야?"라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온 나라가 일 년에 단 하루, 수능 시험 시간에 맞춰 돌아가는 모습에 의아해 하던 친구 표정이 생각납니다. 우리와는 다른 대학 입학 시험 제도를 가진 독일인 입장에서는 의아하게 보이는 게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독일의 수능 시험이라 할 수 있는 아비투어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지인들의 SNS에는 연일 'D-며칠'로 표시된 긴장감 가득한 게시물이 올라옵니다. 시험을 치르는 당사자 만큼이나 부모님들의 속이 타 들어가는 게 눈에 보입니다. 일생 일대의 시험을 앞두고 하루 하루 피 말리듯 전쟁을 치르는 자녀를 바라보는 부모의 안쓰러운 마음이 어떠할지 짐작 만으로도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12년 동안 해온 공부의 '결승선' 같은 대학수학능력시험. 그동안 아무리 잘해왔어도 그 날 하루에 따라 수험생의 운명이 달라집니다. 참 가혹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얼마 전 읽은 <최재천의 공부>에서 최재천 교수님 또한 같은 내용을 지적하셨는데요, 대학 입시에 두 번 떨어졌던 본인의 경험담으로 시작합니다.
"'몇 년을 준비하고 재수까지 했는데, 왜 단 하루 만에 치른 시험으로 합격과 불합격이 결정지어질까? 이 시험을 1년 내내 펼쳐서 하면 어떨까?' 제 머릿속에 든 생각이 '평가가 달라지면 된다'였습니다."
서울대 교수 시절부터 학생들을 대상으로 시험을 치르지 않게 된 이유를 설명하면서 나온 이야기였는데, 저는 저 문장을 읽으며 독일의 대학수학능력시험이라 할 수 있는 '아비투어(Abitur)'를 떠올렸습니다.
어느 나라의 입시 제도가 어느 나라보다 나은지 어떠한지를 판단하는 근거는 아주 여러 측면에서 살펴봐야 하겠지만 적어도 독일의 아비투어는 12년 공부한 것을 단 하루 시험으로 판단하지는 않는다는 면에서 눈여겨볼 만 합니다.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한 독일의 인문계 중고등학교인 김나지움(Gymnasium) 12학년(혹은 각 주의 학년제에 따라 13학년)이 되면 1학기에 아비투어 신청서를 작성, 제출한 후 2학기에 시험을 치르게 됩니다. 총 5개의 과목을 시험보는데 3개는 필기 시험, 2개는 구술 시험을 치릅니다.
필기 시험을 보는 과목은 최소 2개 이상의 과목 분야에서 선택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독일어, 영어, 외국어(프랑스어) 같은 필기 시험 선택은 허용되지 않고 독일어/영어/수학(2개 과목 분야) 혹은 독일어/수학/정치학(3개 과목 분야)과 같은 배치는 가능한 식입니다. 구술 시험은 앞서 필기 시험에서 선택하지 않은 과목 중에서 택할 수 있습니다.
시험 기간은 최소 2주 이상 한 달 가까이 됩니다. 구술 시험은 물론이고 필기 시험도 온전히 서술형으로 제출되기 때문에 한 과목 당 시험 시간이 무려 3시간에서 5시간 가까이 되기 때문입니다. 필기 시험의 경우 제출된 문제에 대해 서술하는 분량이 무려 A4 10장 정도에 이른다고 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토론식 수업을 통해 분석력, 논리력, 언어 구사 능력을 키워왔기 때문에 가능한 시험 방식인 것이죠. 한 과목을 최대 5시간까지 서술해야 하는 과정에서 인내력, 지구력 같은 능력도 요구되고요.
그럼 한 달 간의 아비투어 성적에 따라 대학 입시가 결정되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닙니다. 5과목의 아비투어 시험 성적보다 더 중요한 게 있는데 바로 11학년~12학년 4학기 동안의 성적, 즉 내신 성적이 아주 중요합니다. 즉 내신 성적과 아비투어 점수가 모두 일정 점수에 도달해야 대학 입학 자격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독일에서 '아비투어를 통과했다'라고 말할 때는 단지 마지막 학기 5과목 시험 결과 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11학년과 12학년의 성적까지 통과한 것을 말한 것이죠. '독일의 대학 입시는 11학년에 이미 시작된다'고도 말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4학기 동안의 성적이 굉장히 중요하기 때문에 이 기간 동안 학생들은 정말 열심히 치열하게 공부합니다.
아비투어 통과는 단지 대학 입학만의 문제가 아니라 졸업 자격이기도 한데요, 즉 엄밀히 말해 아비투어는 대학 입학 시험이자 동시에 고등학교 졸업 시험이기도 한 것입니다. 내신 성적이 아무리 좋아도 아비투어 점수에 따라 졸업을 하지 못하고 유급을 당할 수도 있는 셈입니다.
내신과 아비투어 시험 성적을 합한 만점의 점수는 900점입니다. 4학기 동안 내신으로 얻을 수 있는 점수가 최소 200에서 최대 600점이고, 마지막 학기의 5과목 시험으로 얻어지는 점수는 최소 100에서 최대 300점으로 이를 합산했을 때 최대 900점이 되는 셈입니다. 아비투어를 통과하기 위한 기준은 4학기 성적에서 최소 200점, 아비투어 시험에서 최소 100점 이상을 받아야 합니다.
이 기준을 만족하면 대학 입학 자격이 주어지고 각 학생들은 원하는 학교에 지원서를 제출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의학, 치의학, 약학 등 인기가 많은 정원 제한 학과의 경우에는 아비투어 점수 외에도 각 대학이 정한 기타 기준을 적용해 선발합니다. 일례로 의대의 경우에는 실제 의료 기관에서 일정 기간 동안 반드시 실습을 거쳐야만 하는 조건이 있습니다.
독일은 대학 학비가 무상이고 우리나라처럼 대학 서열도 존재하지 않지만 각 대학에 따라 강점이 있는 학과가 있고 또 많은 이들이 입학하기를 원하는 학교는 당연히 존재하기 때문에 아비투어 점수가 높을수록 가고자 하는 대학과 학과에 진학할 확률은 높다고 봐야 합니다. 아비투어를 준비하는 김나지움 학생들이 단순히 통과를 위한 '최저 점수'를 목표로 하는 게 아니라 고득점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 입니다. 다만, 학생의 적성 등을 고려해 입학 후에 과를 옮기거나 학교를 바꾸는 것 역시 (정원 제한 문제만 없다면) 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상황에 비하면 훨씬 유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시험과 다른 점이 또 있습니다. 우리는 대학수학능력 시험 당일 학생의 질병 등과 같은 중대한 개인 상황을 감안해주지 않지만 독일은 의사의 진단서 등이 있을 경우 나중에 기회를 제공 받을 수 있는 장치도 있습니다. 이 역시 서술형, 논술형 시험 방식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시험 과목에 따라 독일어 맞춤법 사전이나 외국어(영어 및 제2 외국어) 사전, 수학 조견표 혹은 수학 공식 모음집과 전자 계산기 등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도 다릅니다. 무언가를 다 외워서 보는 시험 형태가 아니라 어떻게 적용하고 분석하고 연결하고 해석할 것인가를 중요하게 판단하기 때문에 필요한 자료를 제공하기도 하는 것이죠.
수학을 그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독일의 아비투어 시험에서 제출되는 수학 문제는 우리나라의 수능 문항과 달리 풀이 과정을 서술하면서 답을 찾아가게 하거나 '증명하시오'라는 문제들이 대다수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때 공식을 모르면 공식을 찾아볼 수 있고, 숫자가 너무 까다롭거나 크면 전자 계산기 등의 도구를 사용할 수 있는 겁니다. 수학 평가에서 핵심은 공식을 외우거나 연산을 잘하는 것이 아니라 답을 찾아 풀어가는 과정, 증명을 하는 사고의 과정이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비투어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김나지움 과정의 수학 과목에서는 일정 학년 이상이 되면 전자 계산기를 사용해 문제 풀이를 하는데, 그 또한 같은 이유입니다.
독일 학교의 학생들은 어릴 때는 자유롭고 비교적 많이 노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대학 입학을 목적으로 한 김나지움 진학 후에는 한 해 한 해 학습 강도가 눈에 띄게 달라집니다. 다만 모든 학습이 학교에서 배운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고, 아이들 스스로 필요한 공부를 한다는 점이 우리나라 교육과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가정은 경우에 따라 사교육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처럼 모두가 대입을 위해 선행을 하거나 사교육을 시키는 게 보편화 되지도 드러나 있지도 않습니다. 선배 학년이 후배를 가르쳐주는 정도가 공식화 된 '보충 교육' 정도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독일의 대입 방식과 우리나라의 방식은 단순화 해서 비교하긴 어렵습니다. 각 나라의 교육 방식이나 시스템은 오랜 시간 형성되어온 것이고 문화적 차이를 비롯한 각자의 특성을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글의 서두에서 거론한 것처럼 단 하루 시험으로 12년의 공부를 평가 받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가혹한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