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할 줄 아는 아이로 키우고 싶은 부모들에게
생각하는 힘은 배신하지 않는다
우리는 생각이라는 것의 가치를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을 이끌어가는 글로벌 리더들과 혁신을 창조한 이들에게서 찾을 수 있는 공통점이 모두 ‘생각’에 있다는 점도 익히 들어왔습니다.
그들이 세상을 움직이는 방식은 ‘워크홀릭’이 아니라 ‘싱크홀릭’입니다. 각자 자신만의 생각의 공간, 생각을 위한 시간, 깊은 생각을 하는 방식을 갖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경쟁자는 두렵지 않다. 경쟁자의 생각이 두려울 뿐”이라고 말한 빌 게이츠는 1년에 두 차례 ‘생각 주간(think week)’을 만들어 실천했습니다. 가치 있는 질적 결과물이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이 시대에 빌 게이츠는 ‘생각’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스스로에게 부여함으로써 깊이 있고 창조적이며 탁월한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기업가들만의 얘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아는 수많은 현인들은 모두 생각할 줄 알고 생각을 통해 통찰력과 지혜를 깨달아 세상에 이바지한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생각에도 종류가 많습니다.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생각의 힘이란 대니얼 카너먼의 <생각에 관한 생각> 식으로 말해 ‘느리게 생각하기(slow thinking)’를 지칭합니다. 카너먼은 생각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합니다. 하나는 직관적인 생각을 뜻하는 ‘빠르게 생각하기(fast thinking)’입니다. 순발력이 필요한 순간의 판단력, 단순 연산의 정답을 구하는 과정, 어떤 장면이나 장소를 떠올리는 것과 같은 자동적인 개념과 기억의 정신 활동을 뜻합니다. 반면 이성적 사고를 뜻하는 ‘느리게 생각하기’는 즉각적인 답이 떠오르지 않는 문제에 대해 심사숙고하고 깊이 사고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빠르게 생각하기가 ‘인간은 누구나 생각할 줄 안다’의 그 ‘생각’이라면 느리게 생각하기는 연습과 훈련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생각하는 훈련이 돼 있지 않은 사람들은 깊은 생각을 요하는 문제나 상황에 부닥쳤을 때 당황하게 되고 당연히 결론이라는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 포기할 지 모릅니다. 반대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들은 그 과정을 즐기며 꼬리에 꼬리를 문 생각이 데려다 줄 목적지가 어디일까에 대한 기대감마저 갖게 됩니다.
어른이 돼 생각하는 법을 알고 즐길 줄 안다는 건 이미 어린 시절부터 생각하는 습관이 형성된 것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평생 기계적이고 직관적인 생각만을 해온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심오한 문제 앞에서 깊은 사고를 할 수 있을까요. 즉 어린 시절부터 생각하는 습관을 기르고 생각한다는 것의 즐거움을 안다는 것은 아이의 미래와도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세스 고딘은 <빌 게이츠는 왜 생각주간을 만들었을까>라는 책 추천사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세상은 빠르고 복잡하게 돌아가지만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보상은 꼭 돌아온다.”
공부는 때론 배신을 하기도 하지만, 생각하는 힘은 결코 배신하지 않습니다.
생각을 만드는 ‘부모력’_부모가 나의 스펙입니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당신이 어디까지 이를 수 있든, 평생을 살아본다 해도 생각의 한계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생각의 깊이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시기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어서 평생 탐구해야 할 영역이기도 합니다. 당연히 생각을 키우는 것 또한 뚜렷한 목표를 세우기도 그 도달을 확인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현명함, 지혜로움, 성숙함 등 눈에 보이는 성장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그것만으로 생각의 깊이를 깨닫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생각은 어떻게 키울 수 있는 걸까요. 저는 적어도 이 문제 만큼은 결코 사교육이 대신할 수 없다고 봅니다. 아이들의 생각을 자라게 하는 것은 1차적으로 온전히 부모의 몫입니다. '하루 10분 생각에 몰입'이라던가 ‘생각하는 주간’과 같은 어른들의 방식은 아이에게 오히려 생각을 강요해 어렵고 힘든 과제처럼 여길 수 있습니다. 아이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생각하는 습관이 일상에 물처럼 스며들도록 해야 합니다.
아이의 생각은 숲이 형성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결코 한 순간에 숲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씨앗을 뿌리는 일부터 시작해 그 과정이 더디고 인내심을 필요로 하기도 합니다. 때론 멈춘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매일 매 순간 정직하게 자라고 있지요. 어떤 환경이냐에 따라서 속도나 건강한 정도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씨앗을 뿌리고 적절한 환경을 만들어주고 관심을 갖고 지켜봐주는 것이 바로 아이가 만들어가는 생각의 숲을 크게 하기 위해 부모가 해야 할 일들입니다. 생각하는 틈을 만들고 생각이 뿌리내릴 수 있게 아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 호기심 가득한 대화로 자극을 주는 것, 깊은 사고를 이끌어내기 위한 질문을 던지는 것, 독서나 사색과 같이 생각하는 행위를 수반할 수 있는 습관 형성을 해주는 것 등이 씨앗이 되고 좋은 환경이 되어줍니다.
물론 생각의 숲이 반드시 부모가 뿌린 씨앗으로부터 비롯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선가 좋은 씨앗이 아이 마음 밭에 뿌려지기만을 기대하는 것보다 부모가 그 씨앗이 되어주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내 아이의 마음밭이 어떤 토질인지 아는 것도 부모이고 때때로 관찰하고 지켜보며 물도 주고 거름도 주고 넘칠 때는 가지치기를 통해 정리를 해줄 수 있는 것도 부모니까요.
모두들 ‘스펙’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좋은 스펙이 미래를 보장해주는 가치처럼 여겨집니다. 부모들은 내 아이의 스펙을 하나라도 더 만들어주기 위해, 더 좋은 스펙을 쌓아주기 위해 애쓰고 노력합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이들이 부모의 경제력과 정보력도 ‘스펙’의 일부라고 생각하기까지 합니다. ‘부모 스펙’의 확장된 개념으로 ‘부모 찬스’라는 말도 생겨났습니다. 꼭 법적 테두리를 넘어서는 것이 아니더라도 다양한 기회와 경험 제공의 차원에서도 ‘부모 찬스’의 양적 질적 차이는 분명히 존재하는 게 인정해야만 하는 현실일 겁니다.
부모가 스펙이 되는 시대라면, 공평하지 않은 ‘부모 찬스’가 존재하는 시대라면, 다른 의미에서 스펙이 되어주고 부모 찬스를 주는 게 어떨까요. 오히려 아이를 망치는 과잉 보호나 집착이 아니라, 열린 관계와 따뜻한 애착을 통한 건강한 정서와 단단한 내면의 성장을 만들어줄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부모가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스펙이고 부모 찬스가 될 것이라고 자신합니다. 훗날 내 아이가 당당하게 “나에게 최고의 스펙은 부모님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큰 보람은 없지 않을까요. 생각하는 힘을 심어주고 생각이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생각을 나누는 부모가 되어주는 것이야말로 부모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스펙이 아닐까요.
- 저자의 책 <생각이 자라는 아이>(시대인 발행) 중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