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질문> 전 세계 사람들이 똑같은 언어를 쓴다면 어떨까?

<오늘의 질문> 전 세계 사람들이 똑같은 언어를 쓴다면 어떨까?

10월 9일은 한글날입니다. 그 중요한 의미를 되새기고 아이와 이야기를 나눠보는 활동은 지극히 바람직합니다. 다만, 그다지 흥미롭지 않다는 문제가 있는데요. 그래서 사고의 전환을 통한 새로운 방식의 질문으로 아이의 생각을 자극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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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집현전, 28자, 훈민정음... '한글날' 하면 누구나 으레 떠올리는 것들입니다. '백성을 사랑한 세종대왕이 글을 모르는 백성들을 안타깝게 여겨서  학자들과 함께 28글자를 만들고 훈민정음을 반포했다'는 스토리, 어렸을 때부터 하도 들어서 아마 모르는 경우가 거의 없을 겁니다.

한글날을 핑계 삼아 '세종대왕' 밖에 모르는 아이들과 우리말에 대해 이야기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면 아주 시의 적절한 대화 주제가 될 것임이 분명합니다. 부모님들이 다 아는 그 이야기에 지금은 우리가 '한글날'이라고 부르는 날의 시작이 1926년 '가갸날'(민족주의 국어학자들의 단체 조선어연구회가 신민사와 공동 주체로 음력 9월 29일을 지정)이었다가 2년 뒤인 1928년 '한글날'로 정해진 것이라는 점, '훈민정음'이라는 뜻이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등의 정보를 공유해도 좋겠습니다. 또 전 세계에서 쓰이는 언어는 7천 여 개가 넘으며, 전 세계 나라 중 자국 언어를 가진 나라는 28개국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등을 알려주며 자긍심을 키우고 바른 언어의 사용의 필요성과 중요성까지 '목적 있는' 대화를 시도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겁니다.

(한글날에 대한 더 자세한 정보는 다음 기사를 참고하셔도 좋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대화를 꺼내면 많은 아이들이 지루해 할 수도 있고, 또 생각보다 길게 이어질 만한 내용이 아니라 금방 끝나버린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한글날은 말이야~"로 시작해서 "그래서 우리는 우리말에 자부심을 가져야 해"로 이어지고 "언어를 바르게 사용해야겠지?"로 끝나는, 엄마(아빠)가 주로 설명하고 그 사이에 아이의 생각이 들어갈 틈이 없는 대화가 진행되기 쉬운 것이죠. 아이에게 '생각'을 물어볼 만한 여지가 별로 없는 겁니다. 기껏해야 "너는 우리말을 바르게 잘 사용하고 있는 것 같아?" 라거나 "앞으로 어떻게 하는 게 바람직할까?"와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답이 정해진 질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럴 때는 어른들도 생각의 전환을 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아이의 생각을 자극하고 다양한 가능성을 만들며 더 재밌는 대화를 할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이 필요하죠. 예를 들면 이런 식으로요.

"오늘은 한글날이네. 그런데 우리는 한글을 쓰고 미국에선 영어를 쓰고 중국에선 중국어를 쓰고 일본은 일본어를 쓰잖아. 세상에는 7000 개가 넘는 언어가 있대! 굉장하지? 만약에 말야, 전 세계 사람들이 모두 다 하나의 언어를 쓴다면 어떨까? 그러니까 '언어 통일'을 이루는 거지! 어때?"

물론 어떤 아이들의 경우에는 각자의 이유와 상황에 근거해 '전 세계 사람들이 한글을 쓴다면 좋을 텐데'라는 꿈 같은 생각을 품어본 적도 있을 수 있을 텐데요, 그 '말이 안되는' 상상을 본격 질문으로 던져보는 겁니다. '만약에'가 붙는 상상은 흥미로운 대화를 하기에 딱 좋은 주제거든요. 더구나 '언어'를 중심에 둔 '만약에'는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고 언어가 생각에 미치는 영향에 이르기까지 다소 철학적인 사고를 유도하는 효과도 있습니다.

'언어 통일'이라고 하면 누구나 영어를 떠올리기 쉽습니다. 실제로 영어는 글로벌 공용어의 지위를 갖고 있습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넓은 지역에서 사용되고 있죠. 어느 나라를 가든 영어만 잘 구사할 수 있어도 크게 불편하지 않은 이유는 영어의 공용성 때문입니다.

영어가 강력한 지위를 갖게 된 것은 영국의 영향입니다. 수백 년 동안 전 세계에 많은 식민지를 건설하면서 언어적으로도 대단한 영향력을 끼친 겁니다. 물론 20세기 이후 많은 식민지들이 독립을 했지만 식민지 시대의 흔적이 언어로 남게 되었죠. 그러나 영어가 지금과 같이 거의 전 세계를 통일하다시피 한 공용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힘 때문입니다. 미국이 세계의 중심 국가가 되면서 미국에서 쓰이는 영어가 세상을 제패한 것이나 다름 없죠.

이처럼 영어가 가장 실질적인 전 세계 공용어이기는 해도 '영어로 언어 통일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아마 그렇게 된다면 많은 이들이 반발할 게 불 보듯 뻔합니다. 필요에 의해 공용어를 두는 것은 모두에게 편리함을 주기 위함이지만 '영어로 언어 통일'하는 것은 힘의 논리가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앞서도 거론한 영국의 식민지 예를 떠올리면 쉽습니다. 국가의 힘에 의해 언어 통합이 강요 되는 상황인 것이죠.

그렇다면 모두가 인정할 만한 '언어 통일'을 이룰 방법은 없을까요. 있습니다. 그 어떤 나라에도 속하지 않은 '공용어'를 창조하고 다들 그 언어를 사용하기로 '약속'하면 되는 것이죠.  

실제로도 지난 역사를 통해 많은 글로벌 공용어 즉 '국제어'를 만들기 위한 시도와 노력은 있어 왔습니다. 이는 강대국의 언어로 약소국의 언어가 통합되는 것을 폭력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중립적인 인공 국제어를 만들자는 주장에서 시작되었죠.

다양한 국제어 시도가 있었지만 가장 유명한 것이 에스페란토(Esperanto)입니다. 1887년 폴란드의 안과 의사 라자로 루드비코 자멘호프 박사가 창안해 발표한 것인데요, 같은 민족끼리는 모국어를 쓰고 다른 민족과는 에스페란토를 쓰자는 '1민족 2언어주의'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에스페란토'라는 명칭은 에스페란토로 '희망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에스페란토는 국제어의 취지에 맞게 배우기 쉬운 언어로도 유명합니다. 보통 두 세 달 정도면 기초 언어는 마스터할 수 있다고 합니다. 발음 기호 필요 없이 적힌 대로 읽으면 되고, 묵음도 없으며, 모든 품사의 규칙이 예외 없이 일정하기 때문에 전혀 까다롭지 않은 것이죠. 이를 테면 모든 명사는 -o로 끝나고 형용사는 -a, 동사는 과거형 -is, 현재형 -as, 미래형 -os로 끝나는 식입니다.

물론 이 언어는 유럽에서 탄생해 7개의 유럽어를 참고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유럽이나 미국 등 알파벳을 사용하는 서구권에 훨씬 더 유리하긴 합니다. 어떤 데이터에 보면 아시아인들이 에스페란토를 배우는 것인 알파벳 기반의 언어권 사람들에 비해 2배 이상 걸린다는 추정도 있습니다. 그렇다 해도 다른 언어보다 훨씬 쉽고 빨리 배운다는 장점은 확실합니다.

에스페란토 사용자는 점점 늘어서 현재 전 세계 70여 개국에 공인 에스페란토 협회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지난 1920년 에스페란토협회가 설립됐죠. (네이버의 AI 번역기 파파고(Papago)는 에스페란토로 '앵무새'라는 뜻입니다. 파파고의 캐릭터가 앵무새인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그보다 많은 121개국에는 회원이 있고, 현재 에스페란토로 대화가 가능한 인구는 20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언어의 역할이 원래 그렇듯 에스페란토 사용자들도 강한 연대감을 갖고 있는데요, '에스페란티스토'라 불리는 에스페란토 사용자들끼리는  파스포르타 세르보(Pasporta Servo)라는 문화가 있다고 합니다. 에스페란토 사용자가 자신의 거주 지역에 방문하면 먹여주고 재워주는 문화입니다.

에스페란토는 인공 국제어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언어입니다.

다행히(?) 에스페란토는 '1민족 2언어주의'를 주장하기 때문에 인공적으로 만든 국제어로 '언어 통일'이 이뤄진다 하더라도 각 나라의 고유한 언어가 사라질 위험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통일'이 아닌 정말로 단 하나의 언어만 쓰기로 하는 통일이라면 세상은 어떻게 달라질까요?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의 수단만이 아닙니다. 생각을 위한 도구이죠. 예를 들어 같은 색깔을 보고 있다고 하더라도 정확히 그 색을 표현할 만한 언어를 가진 민족과 그렇지 않은 민족 사이에는 사고의 차이가 존재합니다. 아주 쉽게 우리말에 존재하는 '불그스름' '불그레죽죽' '발그레'는 영어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즉 언어는 생각과 직결됩니다. 조지오웰이 <1984>의 해제에서 "개인이 어떤 생각을 갖더라도 이를 표현할 단어가 없으니 나중에는 새로운 생각 자체를 못한다"고 설명하고, 언어학자 벤자민 리 워프가 "언어는 단순히 생각을 드러내는 복제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자체가 생각을 형상화하고 실재하고 만든다'고 말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언어의 다양성은 사고의 다양성, 문화의 다양성으로 직결됩니다. 전 세계 사람들이 하나의 언어를 쓰기로 한다면 편리함은 얻겠지만 그 대신 어마어마한 많은 것들을 잃게 되겠지요.

또, 언어가 사고를 만들어낸다는 측면에서 보면 우리가 왜 바른 언어, 제대로 된 언어를 써야 하는가에 대한 답도 나옵니다. 갈등의 언어, 폭력의 언어, 차별의 언어를 사용하면 우리의 생각에도 당연히 부정적 사고 관념이 만들어지게 될 테니까요.

나아가 요즘 시대의 화두이자 문제로 제기되는 문해력의 저하도 언어 사용 문제와 큰 관련이 있습니다. 텍스트를 멀리하고 시청각 이미지를 더 선호하는 시대적, 세대적 특징이 다양한 언어적 자극, 그로 인한 깊은 사고 활동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말'은 '글'의 다양성과 구체성을 따라가기 힘드니까요. 더구나 그러한 매체들이 은어, 비속어, 부정적 언어들을 많이 사용한다면 생각 또한 그런 언어들에 지대한 영향을 받게 될 테고요.

공용어로 시작해 국제어, 언어와 사고의 관계까지 언어를 중심으로 다양하게 짚어봤는데요, 아이들에게 한글은 아름답고 과학적인 언어라는 것, 우리 말이 소중하다는 것, 잘 지키고 보존해야 한다는 것, 바른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보다 '언어 통일'이라는 흥미로운 질문을 던져봄으로써 스스로 우리 언어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다른 나라의 언어들도 존중하는 태도를 기르며 자신의 언어 사용에 대해서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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