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갈등을 해결하는 마법의 단어, 역지사지(易地思之 )
초급 수준의 사자성어인 '역지사지'에는 많은 갈등 상황을 해결할 수 있고, 문제를 풀어갈 수 있는 위대한 힘이 숨어 있습니다. 토론을 할 때 찬반 논쟁을 통해 '역지사지' 하다 보면 공감 능력과 균형적 시각을 기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역지사지는 부모와 자녀 간의 갈등을 풀어가는 마법 같은 단어이기도 합니다.
한 정치 뉴스를 보다가 어떤 정치인의 멘트가 눈에 띄었습니다.
"이제는 이런 소모적인 정쟁을 그만할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문장만 놓고 보면 박수를 쳐주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정치'는 온 데 간 데 없고 비난과 싸움만이 난무한 정치인들의 행태에 신물이 날 지경이니까요. 그런데 박수는커녕 코웃음이 나옵니다. 같은 사안을 두고 상대 당의 입장에 있었다 해도 저런 말을 하면서 같은 당 정치인들에게 품위를 지키자고 설득하는 역할을 했을까 생각하니 안 봐도 답이 나오더군요. 입장이 달라질 때마다 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 180도 돌변해 전혀 다른 프레임으로 상대를 비난하는 데 에너지를 쏟는 정치인들을 보고 있으면 딱 그 말이 생각납니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혹은 반대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좀 유식하게 사자성어로 표현하자면 '아전인수(我田引水)'입니다. '자기 논에만 물을 끌어다 놓는다'는 뜻으로 자기 이익만 먼저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나 억지로 자기에게 이롭도록 궤변을 늘어놓을 때 쓰는 표현입니다만, 우리가 가장 흔하게 인식하는 '아전인수'의 상황은 어떤 경우든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할 때입니다. 예전에는 'A가 아니라 B'라고 주장하더니 입장이 바뀐 후 지금은 'B가 아니라 A'라고 하는 식이죠. 지금은 A가 맞지만 그때는 A가 틀렸던 것입니다. (물론 살다 보면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린' 일들이 종종 일어나기도 합니다. 세상이 달라지고 상황이 변했는데도 줄곧 옛 사고방식에만 젖어 '죽어도 A가 맞다'라고 주장하는 태도를 옹호하고자 하는 말이 아님을 독자 여러분은 이해하실 것으로 믿습니다.)
'아전인수'와 정 반대의 뜻을 가진 사자성어는 바로 '역지사지(易地思之)'입니다. '아전인수'가 이기적인 태도라면 '역지사지'는 이타적인 생각입니다. 따로 뜻풀이가 필요 없을 정도로 아주 기초적인 수준의 사자성어이지만 굳이 풀어 보자면 ' 易 : 바꿀 역 地 : 땅 지 思 : 생각할 사 之 : 갈지'로 '상대방의 처지나 입장에서 생각해보라'는 뜻입니다. 생각은 머리로 하는 것이지만 '역지사지'에서 생각은 머리가 아닌 마음이 동원됩니다.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라는 건 단순한 생각해보는 '행위' 그 이상 '이해'를 바탕에 깔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마치 상대의 입장이 된 것처럼 처지를 바꿔 온전히 그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헤아려보라는 것이죠.
그렇게만 된다면 싸움이 일어날 일이 없습니다. 아무리 입장을 바꿔 생각해도 도무지 그 사람의 행동과 말이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상대가 되어보려는 그 노력 만으로 이미 '이해'는 시작된 셈입니다. 즉, 서로 다른 입장 차이를 크게 줄이지 못하는 결과를 얻는다 해도 무조건적인 비난과 싸움으로 가지는 않습니다.
제가 '역지사지'를 마법의 단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아전인수'가 갈등의 씨앗이 된다면 '역지사지'는 갈등을 해결하는 역할을 하죠. 아, 오해는 없기를 바랍니다. 갈등의 해결이라는 것이 서로의 입장과 의견 차이가 완전히 사라져 같은 지점에 이르게 되는 것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갈등 없는 사회란 있을 수 없고, 어쩌면 갈등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다양성이 존중되는 건강한 사회라는 증거니까요.
'역지사지'는 대단히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말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사자성어가 탄생한 배경부터 굉장히 이타적입니다. 오히려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태도가 엿보이죠.
'역지사지'는 <맹자(孟子)>의 ‘역지즉개연(易地則皆然)’이라는 표현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 이야기에는 중국 하 나라의 시조인 우(禹)와 주 나라의 시조인 후직(后稷) 그리고 공자의 제자인 안회(顔回)가 등장합니다. 치수(治水)에 성공한 인물로 알려진 우 임금은 물에 빠지는 이가 있으면 자기가 치수를 잘못해서 그가 물에 빠졌다 생각했고, 후직은 굶주리는 자가 있으면 역시 자신의 잘못으로 그가 굶주리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한탄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태평성대를 살면서도 나라 일을 제대로 돌보지 않으면 백성들이 힘들 수 있다는 생각에 몇 년 간 자기 집 앞을 지날 때도 집 안에 한 발자국도 들이지 않았다고도 전해집니다. 백성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여기며 자기 자신과 자신의 가족보다 백성을 먼저 위하는 마음을 가졌던 것이죠.
또 공자의 제자인 안회는 힘든 시기에 백성들이 어렵게 산다고 생각해 스스로도 밥 한 그릇과 물 한 잔만 먹으며 하루하루를 살았는데, 공자는 안회의 이와 같은 행동을 두고 우와 후직과 같은 모습이라며 본받을 필요가 있다고 크게 칭찬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를 두고 맹자는 훗날 “우와 후직, 안회는 모두 같은 길을 가는 사람으로 태평성대를 살든 난세를 살든 서로의 처지가 바뀌었더라도 모두 같게 행동했을 것"이라는 뜻으로 ‘역지즉개연(易地則皆然)’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 말이 변형돼 오늘 날 '다른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해보라'는 뜻의 '역지사지'라는 말이 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제가 아이와 토론을 할 때마다 가장 많이 하는 말 중 하나가 바로 '역지사지'입니다. 토론의 꽃이라 불리는 '논쟁'은 찬성과 반대의 양쪽 입장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방식인데, 이때 역지사지의 태도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토론을 하는 이유는 설령 그것이 치열하고 거침없는 설전으로 치닫는다 하더라도 논쟁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각자의 입장을 좀 더 구체적으로 밝히며 상대를 설득하고자 하는 목표에서 비롯돼 생겨나는 필수 불가결한 과정일 뿐입니다. 그런 과정이 있어야만 양측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지점이 무엇이고, 그 이유와 근거가 어디 있으며, 상대가 주장하는 바의 타당한 면과 그렇지 않은 면까지 파악하고 판단할 수 있게 됩니다.
즉, 상대의 말을 들으며 그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구나'라는 역지사지의 태도를 갖고 있지 않다면 논쟁은 그저 싸움이 되기 십상입니다. 왜냐, 상대의 말을 진심으로 듣지 않고 오로지 내 말만 하거나, 내 주장만 관철 시키려 하다 보면 어떤 해결 방안에도 도달하지 못한 채 감정만 상하고 말 테니까요. 토론을 하는 이유는 합의점 혹은 해결책을 찾기 위함이지 '내 말이 옳고 네 말이 틀리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백 번 생각해도 어떤 사안이 되었든 누군가의 주장이 다 옳기만 하고, 또 누군가의 주장이 다 틀리기만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막상 토론을 하면서 상대의 처지가 돼 생각해보고 이해하기란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특히 아이들이라면 더더욱 그렇죠. 이때는 역지사지를 직접 체험 해볼 수 있도록 상황을 만들어줘야 합니다. 서로 서로 입장을 바꿔서 토론해보도록 하는 것입니다. 같은 논제를 두고 한 번은 찬성 입장에서 토론 했다가 또 한 번은 반대 입장에서 토론을 해보는 방식으로 직접 '역지사지'를 해 보면 상대를 이해하기 쉬워집니다. 제가 아이와 토론 수업을 할 때 '억지로라도' 찬성과 반대 각각의 입장으로 두 번 토론하게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아이들은 공감 능력과 균형적 시각을 기를 수 있습니다. 요즘 아이들이 공감 능력이 떨어진다고 지적 받는 이유는 다른 사람의 입장이 돼보는 훈련이 돼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나를 중심으로만 생각하면 세상을 바라볼 때, 어떤 현안이나 현상을 바라볼 때 다양한 시각이나 의견에 대한 수용과 존중이 어려워져 균형감을 갖추기도 어렵죠.
저는 아이와 토론을 할 때 뿐만 아니라 일상 속에서 대화를 할 때도 논쟁이 될 만한 사안이 있을 때 일부러 '반대 의견'을 제시할 때가 많습니다. 아이가 한 쪽으로만 치우치지 않도록, 아무리 극소수라 하더라도 누군가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인데, 그런 방식으로 대화하다 보면 아이는 어느새 '그럴 수도 있겠네'라는 식으로 생각이 바뀌어 있을 때가 많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아이가 줏대 없이 가치관이 흔들리도록 내버려둔다는 말은 아닙니다. 자신의 신념과 가치에 따른 의견은 지키되 여러 사람의 입장을 헤아려보는 지혜로운 시각을 갖추기 바라는 마음에서 입니다.
하나 더, 역지사지를 하다 보면 '경청'이 필수인데요. 어떻게 보면 경청 없이는 역지사지가 불가능하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 토론 활동에서는 더 그렇습니다. 상대방의 말을 제대로 잘 듣지 않고는 그 입장을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죠. 쌍방향 소통이 아니라 일방적인 주장만 하다가 토론이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역지사지도 경청도 모두 '마음'으로 하는 일이란 생각이 듭니다. 머리로만 생각한다고 제대로 역지사지가 되지 않고, 귀만 열고 듣는다고 제대로 '경청'이 되지 않으니까요. 마음을 열고 진심으로 상대의 입장이 되어보기 위해 노력하는 태도, 마음을 열고 상대의 말을 듣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을 때 문제든 갈등이든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