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질문, 그리고 질문하지 말아야 할 순간에 대하여

좋은 질문, 그리고 질문하지 말아야 할 순간에 대하여

자녀 교육에서 질문이 갖는 힘에 대해서는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이제는 질문의 결을 고민하고 나아가 질문하지 않는 것이 외려 더 좋은 순간에 대한 고민이 필요합니다.

anotherthinking

얼마 전 온라인 강의 중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질문과 대화로 시작하는 토론'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여러분은 아이들과 어떤 대화를 하고 계신가요?"라고 물었을 때  한 독자분이 이런 답을 했습니다.

"어떤 강의에 갔더니 아이에게 질문을 많이 하라는 거예요. '아 그렇구나' 하고 아이에게 질문을 엄청 했더니 아이가 '엄마, 질문 좀 그만해!'라고 하더라고요.(웃음)"

강의가 끝나고 그 발언에 대해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먼저 어떤 상황이었을 지를 그려봤어요. 추측해 보면,

첫째, 아이가 생각할 시간을 충분히 주지 않고 질문이 몰아쳤을 수도 있고,

둘째, 질문 자체가 아이가 답하고 싶지 않거나 흥미롭지 않은 내용이었을 수도 있고,

셋째, 질문해야 한다는 강박에 엄마도 그리 즐겁지 않으면서 만들어 낸 '질문을 위한 질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대화에서 토론에서 아이와의 관계에서 '질문이 갖는 힘'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많은 자녀 교육서마다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덕분에 '아이에게 질문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분이 없어요. 그런데 어떤 질문은 오히려 하지 않는 것만 못하고, 가끔은 질문을 안 하는 것이 훨씬 더 생각을 키우는 방법이 됩니다. 이제 우리는 '질문의 중요성' 그 자체를 넘어 어떤 질문을 해야 하는가, 어떤 순간에 질문하지 말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깊이 고민하고 실천해야 할 때입니다.

질문을 부르는 질문

질문은 아이를 성장하게 할 뿐만 아니라 부모도 함께 성장하게 합니다. 부모의 질문이 아이에게 새로운 질문들을 불러 일으키고, 아이로부터 질문을 받은 부모가 다시 질문하는 순환을 통해 생각이 생각을 부르고 깊이를 만들어갑니다. 지혜와 성숙의 원천이 되는 것이죠.

때문에 아이에게 하는 질문은 반드시 아이 내면에서 또 다른 질문이 솟아날 수 있는 형태라야 합니다. 그리고 역으로 아이가 질문을 던졌을 때 바로 답해주지 말고 아이 스스로 지속적인 질문을 끄집어낼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해요. 질문 자체가 품고 있는 호기심에서 비롯된 또다른 질문들 말입니다. 답이 정해진 질문, 혹은 이미 답이 나와버린 질문 앞에서 아이는 더 이상 호기심도 궁금증도 느끼지 않습니다. 나아가 그런 식의 질문과 답을 경험한 아이는 '답'을 구하기 위한 질문만 하게 되겠죠.

그런데 알다시피 답을 알고자 하는 질문은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가르친다는 것의 의미>의 저자인 막스 반 매넌(Max van Manen)은 '호기심이 없는 질문' 혹은 '피상적인 호기심'에서 비롯된 질문의 예시로 "세상에서 제일 큰 동물은 무엇이에요?" "가장 빠른 동물은 무엇이에요?" "거미 다리를 떼면 어떻게 돼요?" "하늘의 별은 전부 몇 개예요?" "슈퍼맨은 어떻게 강해졌어요?"와 같은 것들을 제시합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설명하죠.

"미처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도 현상을 좀 더 빨리 알도록 다그치는 어른의 경솔한 질문을 통해서 조숙한 호기심이 생겨버린 것이다. 조숙한 호기심은 어른의 너무 많은 질문에 답하면서 생긴다. 어린이의 호기심에 대한 답이나 결론은 섣불리 내지 않아도 되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조숙한 아이는 많이 아는 편이다. 적어도 많이 아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아이는 단지 답을 알고 있을 뿐이지 대부분의 경우는 진짜 궁금해하지 않는다. 조숙한 아이가 묻는 질문은 대부분 빨리 스쳐 지나간다. 이와 같은 질문은 정말 몰두하거나 참된 흥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경쟁적이다. 하나의 흥미는 또 반짝하고 오는 다른 흥미로 인해 쉽게 무시되거나 대체된다.
조숙한 호기심을 가진 아이는 답이 나오면 질문을 하지 않는다. 이런 아이는 질문을 일종의 게임처럼 대한다. 질문이 나오면 바로 호기심을 멈추고 답을 찾는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있는 모든 질문에 정확한 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답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가르친다는 것의 의미> 중 '경이로운 경험을 한다는 것' 중에서

질문이 갖는 힘을 거론할 때마다 빠지지 않는 내용이 바로 '배움에 대한 자발적 태도'입니다. 알고 싶어서, 너무 궁금해서 하는 공부는 진짜 자기 공부입니다. 다시 말해 좋은 질문을 통해 궁금함과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면 아이는 스스로 찾아보고 공부하게 되는 '자기주도성'까지 갖추게 되는 셈이죠. 그러기 위해서라도 질문과 답으로 이어지는 패턴이 아닌 질문-생각-질문으로 이어져 호기심이 싹트도록 하는 질문을 해야만 합니다.

기억나는 '좋은 질문'의 예시가 있습니다. 오래 전인데, 싱글맘들의 육아기를 다루는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김나영 씨가 둘째 아들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어요. "너는 이 세상에 왜 왔어?" 그때 아이 대답은 "엄마 보고 싶어서 왔어"였죠. 이후에 이 질문 상황을 보고 감동 받았다는 또 다른 출연자 배우 조윤희 씨도 어린 딸에게 같은 질문을 합니다. "이 세상에 왜 왔어?" 처음에 아이는 아무 답도 하지 않아요. 그리고 며칠 뒤 엄마가 다시 같은 질문을 했을 때 아이가 답합니다. "엄마 무서울까봐"라고.

아이의 대답을 들은 엄마들, 혹은 그 장면을 시청하던 시청자들은 일단 그 자체로 너무 아름답고 감동스러운 장면이라 느꼈을 거예요. 그리고 '아 나도 해봐야지' 하고 동기부여를 받았을 테고요. 한데 저는 조금 다르게, 김나영 씨의 그 철학적 질문 자체가 너무 훌륭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이는 뜻하지 않은 엄마의 질문을 받고 속으로 무수히 많은 질문과 생각을 떠올렸을 테니까요.

'아, 나 여기 왜 왔지?' '여기 오기 전에 나는 어디 있었지?' '왜 하필 엄마한테 왔지?' '엄마는 나한테 어떤 사람이지?' '나는 엄마한테 어떤 사람이지?'

아이가 어리기 때문에 그런 질문들을 구체적으로 문자로 떠올리지 못했을 뿐, "엄마가 보고 싶어서"라거나 "엄마가 무서울까봐"라는 답을 내놓기 위해서 엄청나게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을 테죠.

방송에서는 아이의 답 이후 또 다른 질문들이 오가지 않았지만 "이 세상에 왜 왔어?"라는 질문은 얼마든지 다른 질문으로 또 다른 질문과 생각을 깨워볼 수 있는 '근본적인 질문'이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질문하지 말아야 할 순간

아이가 유치원 시기일 때 미술관에 자주 데리고 다녔어요. 다양한 문화적 경험을 주고 싶은 엄마 욕심이었죠. 주말마다 사람으로 북적거리는 미술관에서 잘 보이지도 않는 키 작은 아이 손을 잡고 '엄마의 동선'대로 데리고 다니며 "이 작품은 말이야~~"하고 설명을 해주곤 했습니다. 그리고는 여지없이 질문하죠. "이 그림은 어떤 것 같아?" "어떤 느낌이 들어?"

그러던 어느 날 문득 깨달은 게 있어요. 내가 하는 설명과 질문이 아이에게는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요. 아이는 오히려 집 근처 백화점의 사람 없는 작은 전시관 이름도 잘 모르는 작가들의 몇몇 작품을 보는 것을 훨씬 더 좋아했어요. 잘 몰랐기에 설명할 수도 없었던 작품들을 아이는 자기 주관과 감정대로 보고 느끼면서 나올 때는 자기는 어떤 작품이 제일 좋았다라고 알아서 '감상'까지 이야기하더라고요. 그리고 몇몇 작품은 사서 자기 방에 두고 싶다는 의사 표현까지 했어요. 내가 미술을 경험과 감상이 아닌 '공부'로 접근하고 아이에게 주입하고 있었다는 걸 그때 깨달았어요. 이후로는 어디를 가든 무엇을 보든 온전히 아이에게 맡겼어요.

독일에 거주할 때 감사하게도 주변엔 미술관이 넘치는 환경이었습니다. 별로 북적거리는 경우도 드물어서 우리는 자주 가고 갈 때마다 몇 작품 정도만 보고 오는 아주 행복한 경험을 많이 했어요. 어쩔 수 없이 아이는 제가 택한 동선을 따라다닐 때가 많았는데 그때 제가 어떤 작품에 빠져 있는지, 어떤 표정을 짓는지, 어떤 작품 앞에서 오래 머무르는지 등을 파악하면서 질문할 때가 많았습니다. "이 작품이 왜 그렇게 좋아?"라고 묻기도 하고, "이 작가는 누구야?"라고 묻기도 했죠. 자연스레 호기심 어린 질문이 떠오르고 대화로 이어지는 순간들이 많았죠. 뿐만 아니라 자발적 감상을 하던 아이는 본인이 좋아하는 그림의 스타일, 작가 등 취향이라는 게 생기더라고요. 비슷한 풍경을 다르게 그린 두 작가를 스스로 비교하면서 보기도 하고요.

네, 맞아요. 저는 지금 우리가 질문하지 말아야 할 순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질문을 위한 질문으로 오히려 아이의 생각이 닫히고 한계를 짓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같은 그림 앞에서, 풍경 앞에서도 우리는 각자 느끼는 바도 생각하는 바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 감상과 감정을 다그치거나 질문으로 '제한'적 상황을 만들어 버린다면 아이가 경계 밖에서 사고할 기회를 놓쳐버리게 될 수 있겠죠. 적어도 경이로움을 느끼고 경험하고 있을 법한 상황에서라면 질문보다 침묵이 더 필요할 수 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독서 후 활동으로 하는 '질문의 시간'들도 경우에 따라 판단할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전에 썼던 글 <어린이의 책 읽기와 어른의 책 읽기>에서 거론했던 것처럼 어떤 때는 책을 읽고 어떤 질문도 하지 않는 것이, 즉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권리'를 지켜주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아이가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제공하는 셈이 되니까요.

질문인 듯 질문 아닌 질문 같은

다시 처음 독자분의 사례로 돌아가 볼까요. 엄마의 질문은 그 자체로 아이에 대한 관심의 표명이기 때문에 질문 없는 엄마보다는 '질문 많은' 엄마가 좋다고 생각해요. 다만 아이들은 놀랍게도 그 질문의 결을 금방 알아차립니다. 엄마가 정말로 지금 나에 대한 관심과 궁금증으로 하는 질문인지 아니면 어디서 '질문 많이 하세요'라는 말을 듣고 와서 하는 질문인지를 간파한다는 거죠.

모든 질문이 물음표를 달고 있어야 하는 건 아니에요. 가장 좋은 질문은 '질문인 듯 질문 아닌 질문 같은' 질문인지도 모릅니다. 엄마가 무심하게 툭 던진 한 문장이 아이에게는 물음표 달린 질문보다 훨씬 강력할 수도 있어요. "너는 어떻게 생각해? "왜 그렇게 생각해?"라며 '나 지금 질문하고 있어!'라고 하지 않아도, 엄마의 말 끝에 자연스레 생각의 문이 열릴 수 있다면 '호기심에서 질문으로 배움으로' 연결되는 진짜 질문의 힘이 생기는 겁니다.

"날씨가 많이 따뜻해졌네. 나는 겨울이 너무 싫어. 그런데 겨울이 또 봄을 데리고 오니까 그런 점에서는 겨울을 좋아할 수밖에 없어."

얼마 전 아이와 계절 이야기를 하다가 제가 한 말입니다. 이 한 문장으로 시작해 우리는 자신이 좋아하는 계절과 그 계절에 대한 기억과 각 계절의 장단점과 태어난 계절과 좋아하는 계절의 상관 관계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질문하지 않았지만 물음표를 전혀 붙이지 않았지만 아이 마음 속에 많은 질문이 떠오른 덕분이겠죠.  

이제부터 질문의 힘이 아닌 질문의 결을 고민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작가와 대화를 시작하세요
1 이달에 읽은
무료 콘텐츠의 수

이달의 무료 콘텐츠를 모두 읽으셨네요.

유료 구독하시면 갯수 제한 없이 마음껏 읽으실 수 있어요!

Powered by Bluedot, Partner of Mediasphere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