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답 없는 '선택적' 문제, 철학적 사고를 키웁니다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이냐' 하는 'vs' 토론은 어린 아이들에게만 해당되지 않습니다. 좀 더 까다롭고 복잡한 주제, 정답도 없지만 어떤 선택을 하든 뒤따르는 '후속 문제'가 발생하는 '선택적' 질문은 그 자체로 철학적 사고의 시작이 됩니다.
토론하는 상황에 익숙한 우리집 아이는 먼저 토론 상황을 제시하는 일이 잦습니다. "엄마 생각은 어떤데?"라고 묻는 건 기본이고 "지금 이 상황에 대한 엄마 의견은 뭐야?", "만일 엄마라면 어떻게 할 것 같아?"라고 묻기도 합니다. 때로는 결정에 대한 조언을 구하는 질문이기도 한데 대체로는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엄마도 그래? 아니면 반대야?' 하는 식으로 흥미로운 '대화'의 시동을 거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요즘은 아이가 던지는 토론 주제가 좀 더 심오해졌습니다. 토론식 수업을 기본으로 하는 아이 학교에서는 매 과목마다 각각 다른 문제를 제기하며 아이들의 생각과 의견을 교환하는데요, 고학년이 되면서 점점 더 깊이 있는 주제가 등장하는 모양입니다. 며칠 전에는 아이가 윤리 시간에 다룬 주제라며 역시나 "엄마 생각은 어때?"라고 묻더라고요.
아이가 제시한 상황은 어떤 경우를 '선택'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였는데요,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아이의 질문은 "어떤 돼지의 삶을 선택할 것인가"였습니다. '너무 똑똑하지만 고립된 삶을 살고 행복하지 않은 돼지가 될 것인가, 미련하지만 소셜하고 행복한 돼지가 될 것인가' 말입니다. '돼지의 삶'으로 비유하긴 했으나 결국은 인간의 삶에 관한 문제인 거죠.
사실 저는 아이가 수업 중에 어떤 '돼지'를 선택했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평소 '행복'에 큰 가치를 둔 아이는 분명 후자를 택했을 거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저는 일부러 '행복하지 않지만 똑똑한 돼지의 삶'을 선택한 후 아이를 자극해보기로 했습니다. (*아이와의 토론에서 만큼은 '반대를 위한 반대'가 꽤 효과적입니다. 아이 의견에 동조를 해버리는 순간 대화는 바로 결론에 도달해 끝나버리지만, 엄마가 '반대' 의견을 피력하기 시작하면 아이는 엄마를 설득하기 위해 더 적극적이고 다양한 근거를 제시하려고 노력하거든요.)
"음, 어려운 선택이네. 근데 나라면, 똑똑한 돼지의 삶을 택할 것 같아. 당장은 친구도 없고 행복하지 않다고 느끼지만 사실 행복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 거잖아. 사실 엄마도 어떤 때는 오히려 사람들이 아닌 책이나 일, 혼자 하는 활동에서 더 기쁨을 느낄 때가 많거든. 꼭 어딘가에 속해 있어야만 하는 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에 대한 만족감이나 성취, 이런 것도 결국은 행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너는 어떤 선택을 했어?"
"나는 무조건 행복한 돼지지. 평생 행복하지 않게 산다는 건 너무 끔찍한 일이야. 건강에도 좋지 않아서 아마 오래 살지도 못할 거야. 그리고 아무리 똑똑한 돼지면 뭐해. 그 똑똑함이 누군가를 위해서 쓰여야 보람도 있고 기쁠 텐데 가족도 친구도 아무도 없으면 어디 쓸 데가 없잖아."
"하지만 미련한 돼지들이 느끼는 행복이라는 건 그냥 먹고 자고 놀고 하는 아주 기본적인 것들이잖아. 살아가면서 뭔가 성장도 하고 좀 나아지는 면이 있어야 하는데, 평생 그렇게 기본적인 삶에 만족하면서 사는 게 진정한 행복이 될 수 있나? 그리고 그렇게 모여 살면 분명히 싸움도 많고 갈등도 많을 수밖에 없을 거야. 항상 행복한 건 아니란 거지."
"기본적인 행복이 있어야 그 다음 단계의 행복도 가능한 거 아니야? 그리고 미련한 돼지들은 소셜하니까 다양한 관계나 경험을 통해서 얻는 지식도 분명히 있을 거야. 엄마는 항상 경험이 좋은 공부라고 말했잖아. 미련한 돼지들이 어쩌면 나중에는 더 똑똑해질 수도 있어. 똑똑한 돼지는 자기 혼자니까 경쟁하거나 비교할 대상도 없잖아. 항상 자기가 최고라고 생각하고 이기적이 될 수도 있어."
"음, 그것도 맞는 말이네. 네 말을 들으니까 '미련하지만 소셜한 돼지'도 장점이 많은 것 같아. 그런데 말야, 똑똑한 돼지를 미련한 돼지들한테 보내서 좀 가르치라고 하면 안돼? 똑똑한 돼지는 다른 돼지들한테 사회성도 배우고 말이야. 서로 서로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때? 양쪽 다 경험해봐야 어떤 게 자기한테 더 좋은 환경인지 확실히 판단할 수도 있을 테고."
우리의 토론은 웃으면서 마무리가 됐습니다. 아이는 자기와 반대의 의견을 펼치던 엄마가 '설득 당하는 듯한' 모습에서 성취감을 느끼는 것 같더라고요. 저는 "이런 토론 너무 재밌어! 다음에도 또 흥미로운 주제가 있으면 말해줘."라며 다음을 기약했습니다.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가'에 관한 선택권 토론은 아주 어린 아이일 때부터 가장 흔하게 접하고 쉽게 시도해볼 수 있는 토론 방법입니다. (*선택권을 주는 'VS 토론'에 관한 글을 참고하세요) 소재적인 측면에서도 그렇지만 선택권을 주는 토론이 아이의 사고를 자극하고, 독립적으로 만들고, 나아가 자기 주도력도 키우죠.
어린 시절의 선택권 질문이 말 그대로 '자기 선택을 위한 결정' 과정에서 생각하고 의견을 말하게 하는 것이라면, 좀 더 성숙한 후에 접하는 선택적 질문은 그 자체로 철학적 사고와 토론의 시작이 됩니다. 위에서 아이와 제가 나누었던 '돼지의 삶'에 관한 질문이 그러하듯, 어차피 정답이 없는 문제이고 어떤 선택도 완벽할 수 없지만, 그래도 '어떻게 하는 것이 더 가치 있는 선택인가'에 대해 고민해보고 판단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생각은 더 깊어지고 풍성해지게 되는 겁니다.
대체로 이런 질문은 극적 '결함'을 바탕으로 합니다. A를 택하든 B를 택하든 반드시 뒤따르는 문제점들이 있죠. 그래서 끊임없는 질문이 생겨날 여지가 만들어지고 그렇게 깊이 있는 토론이 가능해집니다. 아이와 제가 나눈 토론 역시 깊게 들어가면 '똑똑하다는 것의 정의', '행복의 주관성과 객관성', '사회적 관계가 주는 만족과 문제점' 등 더 다양한 관점에서 토론해볼 수 있는 주제이기도 한 것처럼 말입니다.
어떤 질문들이 가능할 수 있을지 한번 예를 들어볼까요?
Q. 가난하지만 따뜻한 가족이 있는 게 좋을까 vs 부자지만 사이 나쁜 가족이 있는 게 좋을까?
Q. 모든 면에서 잘 맞는 베스트 프렌드 딱 한 명이 있는 게 좋을까 vs 사이가 그냥 그렇지만 굉장히 많은 친구가 있는 게 좋을까?
Q. 특별히 한 과목을 엄청 잘하는 게 좋을까 vs 대부분의 과목을 적당히 잘하는 게 좋을까?
Q. 사생활이 없어도 엄청 유명해지는 게 좋을까 vs 평범한 사람으로 자유를 누리며 사는 게 좋을까?
Q. 산 정상에 오르려고 하는데 엄청 험난하지만 30분 만에 갈 수 있는 길이 좋을까 vs 평탄하지만 3시간 걸리는 길이 좋을까?
Q. 똑똑한 두뇌를 얻는 게 좋을까 vs 엄청 멋진(예쁜) 외모를 얻는 게 좋을까?
Q. 노력하지 않지만 타고난 천재인 게 좋을까 vs 타고난 능력은 없지만 성실한 노력파인 게 좋을까?
Q. 나와 아무 상관 없는 1명에게 피해를 끼치는 상황이 나을까 vs 나와 친한 3명에게 피해를 끼치는 상황이 나을까?
현실에서 일어나기 어려울 법한 다소 과장된 상황이 포함된 질문들이지만, 이런 문제는 어떤 선택을 해도 완전하지 않다는 점에서 더 깊은 생각을 필요로 합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질문들이 더 다양한 관점과 생각을 자극하는 거죠. 양측이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만큼 토론이 흥미진진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생각을 이어나가는 동안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고민해볼 수 있는 것도 큰 장점입니다.
개인적으로 철학 토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첫 번째 이유가 바로 이 '가치관' 때문인데요, 이런 종류의 대화나 토론을 아이와 끊임없이 나눌 수 있다면 건강하고 바른 가치관을 만드는 데 엄청난 도움이 됩니다. 요즘 아이들 교육에서 중시되는 정서, 인격, 성품도 토론을 통해 얼마든지 기를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