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 머리 토론> '심심한' 음식을 먹으며 '심심한' 사과에 대해 대화하니 '심심'하지 않았던 그날
밥상 머리는 토론 초보자들에게 가장 편한 장소이자 시간입니다. 식탁에 앉은 순간 만큼은 '침묵'이 가장 큰 적입니다. 화기애애한 일상적 이야기도 좋지만 때로는 식탁에 어울리는 토론 주제를 올리고 대화해 보세요. '토론 실전'을 보다 세분화 해 초보자를 위한 <밥상 머리 토론> 자료를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오늘은 먼저 '심심한 사과'를 식탁 위에 올려 볼까요?
'심심한 사과'라는 표현을 두고 어제 하루 종일 문해력, 어휘력 저하 논란이 벌어졌습니다.
발단이 된 에피소드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한 온라인 카페가 웹툰 작가의 사인회 예약 과정에서 시스템 오류가 발생한 것을 두고 사과하는 과정에서 '심심한 사과'라는 표현을 쓰자 일부 누리꾼들이 "제대로 된 사과도 아니고 심심한 사과?", "나는 하나도 안 심심하다"라는 식으로 발끈한 것입니다. 여기서 '심심한'은 '마음의 표현 정도가 매우 깊고 간절한'의 뜻인데 '지루하다'의 '심심한'으로 해석해서 벌어진 일입니다.
우리 국민의 심각한 문해력 저하에 대한 우려가 다시 제기된 가운데 이와 관련한 또 다른 에피소드가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2년 전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던 '사흘' 논란이 대표적입니다. 당시 광복절 연휴가 8월 15일~17일까지 3일 간이라는 소식을 전하며 언론에서 '사흘 연휴'라고 하자 일부 누리꾼이 "연휴가 3일 인데 왜 '4흘'이라고 하느냐"며 오보가 아닌지 따지며 벌어진 일이었죠.
또 있습니다. '금일'을 '금요일'로 알아듣고 과제 제출을 제 때에 하지 못한 대학생이 '금일'이라는 발언을 한 교수에게 '오해를 살 만한 표현을 했다'며 항의했다는 일, 코로나 19에 확진돼 수업에 참여하지 못한 대학생들이 그 사유로 '병역'을 선택해 학교 측에서 '병역은 입대와 관련한 내용'이라는 설명을 덧붙인 단체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는 사연 등이 그것입니다. 필자가 본 어떤 댓글에서는 "이제 '무료하다'라고 하면 '공짜'라고 알아 듣겠다"는 푸념 섞인 발언도 있었고요.
언젠가 고등학생들 중에 '일탈'을 '일상 탈출'의 줄임말이라고 알고 있다는 뉴스를 봤을 때 '진짜 이 정도인가' 싶어서 당황스러웠는데 툭하면 터지는 어휘력 논란을 들여다 보면 단지 어린이, 청소년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이를 막론하고 활자 읽기를 멀리하는 탓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일명 손에 스마트폰을 쥐고 태어난다는 세대들은 말할 것도 없고 어른들도 이제는 읽지 않고 '보고 듣기'에 열광하니까요.
여담이지만 책을 출판하는 과정에서 출판사 관계자들로부터 수도 없이 들은 말이 있습니다. "쉽게 쓰셔야 해요. 중간 중간 제목을 달아서 글의 호흡도 자주 끊어줘야 하고요. 길게 쓰실 필요 없어요. 요즘 독자들은 글이 조금만 어렵고 길어져도 어려워하고 읽지 않아요." 책 안 읽는 대한민국의 모습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그나마 필요에 의해 책을 집어 드는 독자들도 글 읽기가 쉽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인 모양입니다.
문해력 저하도 그렇지만 더 놀라운 건 부족한 어휘력에도 당당한 태도입니다. 잘 안 쓰는 표현을 쓴다고, 오해를 불러 일으킬 어휘를 사용한다고 오히려 따지고 항의하는 걸 보면 혼란스러운 마음이 듭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오히려 '심심한'이나 '사흘', '금일' 같은 어휘가 일상에서 쓰이지 않는 사라져야 할 표현일 지도 모르니까요.
이런 일을 겪고 나면 내 아이의 언어 문제 만큼은 더 신경을 써야겠다는 다짐을 강하게 하게 되는데요, 사실 문해력 논란과 관계없이 아이와 하는 <엄마표 토론>의 주제로 언어 사용이나 표현력 문제를 종종 선택합니다. 언어는 단순한 표현 수단이 아니라 생각의 토대가 되는 틀이자 나아가 인격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바른 언어, 제대로 된 표현력을 갖추는 일에 관심이 많은 까닭입니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4학년까지 외국에서 학교를 다닌 아이의 개인적 특수성도 이유입니다. 한국에서 학교를 다닌 또래들 보다 어쩔 수 없이 우리말 노출이 적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 신경을 써야만 했죠.
'사흘 논란'이 있었을 때도 아이와 어휘력과 표현력의 문제를 논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심심한 사과' 논란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보기로 했습니다. 화제가 되는 에피소드가 곁들여 지면 대화는 더 활기를 띠고 기억에도 오래 남는 법이라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활용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토론할 때와 달리 이런 식의 토론은 아이의 생각을 이끌어 가기 위한 유도적 발언들이 어느 정도 계산된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 대화하면 가장 효과적일까 고민하다가 '밥상 머리'를 선택한 것은 '심심하다'의 또 다른 뜻까지 한꺼번에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자, 어떻게 진행했는지 쉽게 정리해서 보여드리겠습니다.
이미 아시겠지만 어디까지나 우리 집의 대화는 하나의 예시일 뿐, 각자의 상황과 여건, 아이의 성향에 따라 다르게 적용해보시길 바랍니다.
1.관련 에피소드가 실린 뉴스 내용을 공유합니다.
"오늘 엄마가 읽은 뉴스 중에 이런 게 있었어!" 평소 토론 수업을 진행하는 식이었다면 함께 기사를 읽었겠지만 이날은 식사 중 대화 소재로 꺼낸 것이었으므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이야기하듯 들려주었죠. 내용을 공유하며 온라인 업체가 낸 사과문 중 '심심한 사과'라는 표현에 일부 누리꾼들이 기분 나빠했다는 데까지만 알려준 후 아이가 생각하는 '심심한'의 뜻을 먼저 물어보았습니다.
"이 사과문에서 '심심한'의 뜻이 뭐라고 생각해?"
잠시 고민하던 아이가 답합니다.
"글쎄, 마음이 두 개라는 뜻인가? 겉으로는 미안해 하는데 속으로는 아니라는 뜻? "
'마음 심'을 두 개로 보고 나름 창의적인 해석이긴 했지만 틀렸다는 걸 지적해준 후, 바른 뜻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표현에 기분 나쁘다고 반응한 누리꾼들이 '심심한'을 '지루하다'는 뜻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란 사실도 말해주었고요.
2. 밥상 머리를 활용해 '심심하다'의 또 다른 표현도 자연스레 알려주었습니다.
이번 논란의 이유는 동음이의어를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읽고 쓸 때 똑같이 '심심하다'라고 표현하지만 상황 별로 전혀 다른 '심심하다'가 쓰이는 것이죠. 즉 '심심한 사과'에서의 '심심하다'는' 심할 심'에 '깊을 심'을 써서 간절함을 표현한 것인데 '심심한 사과' 뿐만 아니라 '심심한 감사', '심심한 위로' 등으로 자주 쓰입니다. 논란을 일으킨 해석은 바로 지루하다는 뜻의 '심심하다'인데 이때는 한자어가 아닌 순 우리말입니다.
또 있습니다. 오늘의 토론을 '식탁 위'로 정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한데 바로 음식 맛을 표현할 때 싱겁다는 뜻으로 '심심하다'가 쓰이는 것이죠. 이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저는 일부러 '심심한' 반찬을 식탁 위에 올리는 나름의 전략도 취했습니다.
"아까 네가 구운 고기가 싱겁다고 소금 달라고 했잖아? 그럴 때 '싱겁다' 대신 '심심하다'라고 표현할 수 있는 거지. 보통 음식 맛에 대해 '심심하다'고 말하는 건 어른들인데, 재밌는 표현 같지 않아? 어른들이 대화할 때 지루하다는 뜻으로 '아 심심하다'라고 말하면 다른 사람이 '심심하면 소금 먹어!'라고 받아칠 때가 있거든. '심심하다'라는 말이 가진 다른 뜻을 이용해서 농담을 하는 거지."
3. '사흘' 논란까지 소환해 사람들의 표현력 문제, 어휘 사용 문제에 대해 묻고 대화합니다.
어휘력 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일각에서는 '다른 쉬운 표현을 두고 굳이 잘 안 쓰는 어려운 표현을 쓸 이유가 있느냐'는 의견도 나옵니다. 어른들보다 어휘력이 부족한 아이들은 이런 의견에 동조하기가 쉽죠. '심심한 사과' 대신 '진심 어린 사과'라고 하면 되고 '사흘' 대신 '3일'을 쓰면 되고 '금일' 대신 '오늘'이라고 하면 되니까요.
그러나 언어 문제는 그렇게 편의적으로 생각할 문제 만은 아닙니다. 더구나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표현들이 사라져가는 고어나 극히 일부에서만 사용하는 표현이 아니라는 점을 상기하면 반성하고 돌아볼 지점이지 따지고 항의할 문제는 아니거든요.
"어떤 사람들은 왜 어려운 단어를 쓰냐고 쉬운 말을 쓰면 되지 않느냐고 불만을 드러내기도 하는데, 넌 어떻게 생각해?"
역시 어려운 어휘가 많다고 느끼는 아이 입장에서는 그 의견에 동의를 합니다.
"그러면 좋지 않을까? 나 같은 아이들도 다같이 쉽게 이해할 수 있잖아."
아이의 의견에도 일리가 있죠. 그러나 앞서도 말한 것처럼 오늘은 토론의 형태이긴 하지만 엄마가 생각하는 가치를 아이에게 효과적으로 잘 전달하기 위한 자리이니, 인정과 지적을 동시에 해야 합니다.
"그래, 그 말도 맞아. 만일 청중이나 독자가 어린이부터 해당된다면 당연히 아이들도 이해할 수 있는 표현을 쓰는 게 맞겠지. 그런데 모든 상황이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건 아닌데도 반드시 쉬운 말만 써야 할까? 네가 잘 쓰는 표현 중에 '태반'이라는 말 있잖아. 그게 '거의'라는 뜻인데, 너는 왜 어려운데도 그 표현을 자주 쓰는 거야?"
"어? 그 표현이 재밌거든. 내가 어른처럼 고급 언어를 쓰는 느낌도 들고."
"맞아. 표현의 다양성 측면, 어휘가 초보적이냐 고급이냐 하는 수준의 문제 등 다양한 의미에서 여러가지 표현이나 어휘가 필요하지 않을까? 다른 건 몰라도 책 같은 데서 항상 쉬운 언어만 똑같이 반복하면 정말 지루할 것 같지 않니? 그리고 심심한, 사흘, 이런 건 진짜 너무 쉬운 단어야. 아이들에겐 좀 익숙하지 않을지 몰라도. 그걸 모르는 어른들은 스스로를 반성할 일이지 '왜 내가 모르는 단어를 쓰느냐'고 아이처럼 떼 쓸 일은 아닌 것 같아."
4. 이야기가 또 다른 언어 사용 문제로 확장되기도 합니다.
이야기를 주고 받다가 불쑥 아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한자를 너무 많이 쓰는 건 별로 안 좋은 것 같아."
요즘 아이들이 특히 한자에 익숙하지 않은 세대이다 보니 당연히 들 수 있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우리말의 상당 부분은 한자어에서 비롯됐기 때문에 한자 자체를 아예 배제하고는 자유로운 언어의 사용이 불가능할 정도죠. 한자어는 우리말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아이에게는 '한자어'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하도록 도와줄 필요도 있습니다.
"한글에는 순 우리말도 있고 한자어도 굉장히 많아. 그래서 한자를 쓰지 않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지. 하지만 엄마도 아주 일부 사람들만 쓰는 어려운 한자어를 사용하는 건 반대야. 그건 꼭 한자어만의 문제는 아닌데, '현학적'이라는 표현이 있거든. 그 표현 자체가 좀 어려운데 '똑똑한 걸 자랑한다' 그런 뜻이야. 그렇게 똑똑한 걸 자랑하기 위해 일부러 어려운 표현을 쓰면 그걸 '현학적 표현'이라고 해. 그런 태도는 엄마도 반대야. 근데 그런 사람들이 꼭 있더라!"
5. 즐겁게 대화를 마무리합니다.
마지막 '현학적'까지 오니 아이가 이해를 하고 있는지 어떤지, 가볍게 밥상 머리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너무 깊어졌나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역시 마무리는 즐겁게 하기로 했죠.
"너 '방귀'가 순 우리말일 것 같아 아니면 한자어일 것 같아?"
듣기만 해도 빵 터지는 단어를 마무리 대화에 올리니 아니나 다를까 표정이 바뀝니다.
"당연히 순 우리말 아니야?"
"땡! 틀렸어. 방귀는 원래는 한자로 '방기'였어. 놓을 '방'자에 기운 '기'자를 쓰는 한자야. 기운을 놓는다, 그러니까 가스를 밖으로 내놓는다, 그런 뜻이야. 그런데 그게 '방귀'가 되면서 한자에서 비롯된 우리말이 된 거지. 재밌지? 나중에 친구들한테 얘기해주면 엄청 재밌어 할 거야."
'심심한 사과'라는 표현이 불러온 논란으로 우리 집 밥상 머리는 덕분에 전혀 심심하지 않았네요.
밥상 머리에서 심심하다고 느끼면 대화 주제로 한번 올려 보시길 바랍니다. 일단 '심심하다'의 여러 뜻만 알게 돼도 그게 어디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