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파 선생님의 피아노 레슨, 피아노는 안 치고 왜 질문만...?

독일파 선생님의 피아노 레슨, 피아노는 안 치고 왜 질문만...?

피아노를 치는 것보다 질문하고 대화하는 시간이 더 많은 피아노 레슨, 상상이 되시나요? 이런 수업 방식은 아이를 어떻게 변화 시킬까요?

anotherthinking

만 5세가 되기도 전 피아노를 시작해 6년 넘게 쉬지 않고 피아노를 배웠던 아들 아이는 6학년이던 지난해 피아노를 그만두었습니다. 이제 '예체능 끊고 공부를 해야 할 타이밍' 이런 이유는 절대 아니고, 아이가 더 이상 피아노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저 취미였지만 피아노를 시작하고 단 한 번도 지루해 하지 않았는데 보아하니 선생님이 내주신 숙제를, 그것도 레슨 당일 선생님 오시기 직전에 마지 못해 하고 있더라고요. 즐겁기는커녕 숙제를 마쳐야 한다는 의무감에 너무 괴로워 하면서요.

안 되겠다 싶어서 피아노를 그만 둘 것을 제안했습니다. 장래 희망 중 하나가 작곡가인 데다 스스로 '나는 피아노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자부심이 있는 아이는 '흥미가 떨어진 것은 맞지만 레슨은 계속 하겠다'고 고집을 피웠습니다. 판단컨대 그마저도 피아노를 놓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한 게 아닌가 싶어요. 피아노를 시작할 때도 스스로 하고 싶은 마음으로 했듯이 그만두는 것도 아이의 의사를 충분히 반영해주고 싶어서 두 달의 유예 기간을 주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겨우 일주일에 한 번 레슨 시간에만 피아노 앞에 앉는 일이 내내 반복됐죠.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 없었던 아이는 '내가 언제라도 배우고 싶은 마음이 들면 그때 다시 레슨을 해도 된다는 약속을 해달라'는 단서를 달고 피아노를 그만두었습니다. 아, 정확히 표현하면 다시 즐겁게 자발적으로 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까지 '잠깐 쉬기로' 한 겁니다.

처음에 저는 아이가 6개월 안에 마음이 돌아올 것이라고 예상했어요. 그런데 아니더라고요. 무려 1년이 지나도록 아이는 '다시 피아노가 하고 싶어졌다'는 말을 하지 않았어요. 그랬던 아이가 한 달 전부터 다시 피아노 레슨을 시작했습니다. 계기는 독일에서 아이에게 피아노를 가르쳐주셨던 선생님의 귀국이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2학기부터 4학년 첫 학기까지 만 3년 간 아이에게 피아노를 가르쳐준 선생님이 독일 유학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이 아이의 마음을 흔든 거죠.

Image by Stable Diffusion

초등학교 3학년 때 아이가 본격적으로 작곡에 흥미를 붙이고 시작할 수 있었던 건 선생님 영향이 적지 않았습니다. 늘 아이의 표현과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셨고, 아이가 피아노는 물론 음악 자체에 더 큰 재미를 느낄 수 있게 이끌어주셨죠. 귀국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헤어지게 됐을 때 '서울에서 꼭 다시 만나자'라고 약속했었는데 2년 6개월 여 만에 다시 만날 수 있는 여건이 됐으니 아이에게 없던 흥미도 솟아나는 게 어쩌면 당연했습니다.

이후 아이는 다시 자발적으로 피아노 앞에 앉더라고요. 과제를 내주시지 않았는데도 말이에요. 더 신기한 건 레슨을 받는 1시간 동안 방안에서 피아노 소리보다 말 소리가 더 많이 들려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처음 한 번은 '오랜만에 만난 만큼 할 이야기 많은가 보다' 생각하고 말았는데 이후로도 계속 피아노 치는 시간보다 대화하는 시간이 더 많은 것처럼 느껴지더라고요. 그래서 궁금한 마음에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대화를 하느냐고요.

"선생님이 질문을 많이 해. 지금 베토벤 곡을 치고 있잖아. 선생님이 '이 부분에서 베토벤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쳤을 것 같아?'라고 묻거나 '이 부분에서 어떤 표현을 하는 게 제일 좋을 것 같아?'라는 식으로 질문하면 나는 또 생각하고 대답하지. 나는 이렇게 질문하는 방식이 너무 좋아. 예전에는 그냥 피아노만 잘 쳐야 되니까 재미가 없었는데 지금은 선생님이랑 대화하면서 어떻게 치는 게 좋을까 생각도 하고, 베토벤이 어떤 느낌을 가졌을지 상상해보는 것도 재밌어."

아이의 대답을 듣고 머릿속에서 '뿅'하고 깨달음의 폭죽이 터진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그렇게 피아노를 좋아했던 아이가 흥미를 잃었던 것은 피아노에 대한 접근법 자체가 달랐기 때문이었던 겁니다. 한국에 돌아와 아이를 지도해주신 선생님은 정말 경험도 많고 열정도 넘치고 훌륭한 분이셨지만, 완곡을 배우고 테크닉을 익히고 건반을 유려하게 치는 방식을 가르쳐주셨던 반면, 독일에서부터 아이를 봐주신 선생님은 늘 감정과 표현, 곡 자체에 대한 해석과 곡의 스토리 등에 더 신경을 쓰는 분이셨던 겁니다.

Prompt : A man who looks like the composer Beethoven is sitting at a piano, spreading out his sheet music and pondering. , painting, expressive/ Image by Stable Diffusion

아이의 이야기를 듣고 오래 전 선생님이 하셨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서울에서 대학을 마치고 독일로 피아노 유학을 온 뒤 교수님들의 수업 방식에 적응이 안돼 너무 힘들었다는 이야기였는데, 기억나는 대로 옮기면 대략 이런 내용이었어요. 독일인 교수님들이 피아노 치는 것은 가르치지 않고 작곡가들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그들이 특정 시기마다 어떤 일을 겪었고 그때 감정이 어떠했으며, 그래서 그 즈음 탄생한 곡의 분위기가 어떠하다, 식의 이야기를 그렇게 하신다는 거였어요. 그리고 내주는 과제가 베토벤의 발자취를 따라 여행을 해보고 감상을 적어보라는 식이었다고도 했습니다.

처음엔 너무 충격이었다고 했어요. 평생 피아노를 치는 것에만 몰두하며 배워왔는데 갑자기 수업 방식이 극단적으로 달라졌으니 적응하는 것도 쉽지 않았고요. 몇 년을 그렇게 보내면서 왜 그런 수업 방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한가에 대해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피아노의 기술과 기교를 배우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머리와 마음으로 음악 자체를 이해하고 느껴야만 손끝에서 좋은 음악이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었죠.

그 다음 수업 시간에 선생님께 '질문하는 피아노 수업'에 대해 적극 찬성하는 입장을 전달했더니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한국에 와서 몇몇 아이들을 가르쳐보니 기계적으로 피아노를 '치기만' 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처음 배우거나 어느 정도 칠 수 있을 수준이 될 때까지는 그렇게 배우는 것도 필요하지만, 악보 보고 칠 수 있는 친구들은 스스로 생각하면서 피아노를 치는 게 더 중요하거든요. 그런 아이들에게는 '몇 번 씩 쳐오기' 같은 과제도 사실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곡에 대한 감정이나 정서를 상상하고 고민하면서 건반 위에서 자기 느낌을 살려내는 게 더 중요하니까요."

예전에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땐 전공자들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라고 여겼었는데, 막상 우리 아이 경우를 겪고 보니 취미라 하더라도 음악을 오래 지속할 수 있는 힘은 결국 음악 자체를 좋아하고 사랑할 수 있는 방식을 배우는 것에서 나온다는 생각이 듭니다.

독일 학교의 크리스마스 '발표회' 모습. ©어나더씽킹랩

같은 맥락에서, 돌이켜 보니 독일 학교에서 음악 시간은 한국 학교에서의 그것과 상당히 다르다는 점도 새삼 상기하게 됩니다. 우리의 방식은 노래하고 악기를 연주하는 실기적인 부분(평가도 하고요!)과 함께 음악 이론도 필수로 배우지만, 독일에서 음악 시간은 그저 음악을 듣고 감상을 공유하거나 노래를 배워 따라 부르거나 율동을 익히는 등 음악을 매개로 한 '놀이' 시간일 뿐입니다.

그렇게 일 년 동안 수업 시간에 배운 노래나 율동, 악기 연주 등을 크리스마스 행사 때 부모님들을 모시고 발표를 하기도 하는데요, 노래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악기 연주를 제대로 하고 못하고를 떠나 얼마나 다들 진지하게 열심히 임하는지 그 모습을 보는 자체가 감동이곤 했습니다. 그리곤 한편으로 '우리나라 같으면 저 정도 실력으로 절대 무대에 올리지 않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동시에 음악 교육에서 중요한 건 '평가'가 아니라 모두가 음악을 즐기고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깨달음도 얻었고요.  

(**독일은 주마다 교육 커리큘럼이 다르고 특히 음악의 경우 전문적으로 관련 교육을 받은 음악 선생님이 아닌 경우도 많아서 일반화하긴 어렵지만 대체로 '놀이' 시간으로 받아들입니다. 고학년이 되면 작곡가들이나 기본 이론을 배우기도 하지만, 놀랍게도 7~8학년 정도 되는 아이들 중에도 아주 기본적인 악보나 음표조차 읽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음악의 나라 독일에서 음악 교육이 너무 체계적이지 않다는 비판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뮤직 슐레(Music Schule)'라 불리는 국가 지원을 받는 음악 학교에서 악기나 음악을 배우고자 하는 희망자들에게 기회를 주고 있기 때문에 공립 학교 특히 초등학교의 음악 시간은 '음악 자체'를 즐기는 수준이어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이 방에서는 요즘, 레슨이 없는 날인데도 피아노 소리가 들려오곤 합니다. 최근 배우고 있는 곡을 치기도 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곡을 치기도 하는데요, 그 소리가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습니다. 유려하게 잘 치기 때문이 아니라 아이가 스스로 좋아서 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른 것도 아닌 피아노 수업에서도 '질문'이 이처럼 영향력을 발휘한다니, 아이를 생각하게 만드는 질문의 힘이 정말 놀랍지 않나요?  

작가와 대화를 시작하세요
1 이달에 읽은
무료 콘텐츠의 수

이달의 무료 콘텐츠를 모두 읽으셨네요.

유료 구독하시면 갯수 제한 없이 마음껏 읽으실 수 있어요!

Powered by Bluedot, Partner of Mediasphere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