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의 기술> 잠수교->폭우->기후 변화->역지사지->맨홀->수학으로 이어진 대화가 남긴 것
토론은 곧 대화입니다. 토론을 잘하기 위해서는 대화 기술이 필요한 법이죠. 그러나 대화는 그 자체로 막강한 힘을 발휘합니다. 아이가 어릴 때부터 깊이 있는 대화를 습관적으로 하며 대화의 기술을 축적해 나간다면 엄마표 토론은 물론이고 그 어떤 갈등 상황에서도 큰 힘이 됩니다. 일상의 소재로 시작해 연결하고 확장해나가는 방식으로 대화의 기술을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한창 사춘기를 지나고 있는 지인의 딸을 최근 인터뷰했습니다. 친구 관계를 비롯해 사사건건 딸아이와 부딪치는 상황에서 무척 힘들어하는 지인을 보면서 제가 먼저 제안한 일이었습니다. 갈등 상황이 벌어지고 그에 대해 대화(라기 보다는 설전)를 나누다 제대로 된 해결책 없이 단순 봉합하기를 반복하는 것을 보면서 도대체 아이의 속 마음은 무엇인지, 어떤 생각들을 하고 있는지 들여다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말싸움이나 다툼 비슷한 형태로 오가는 말들, 아이가 갖고 있는 불평과 불만,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요소 등을 전해 들으며 대략적인 문제점을 파악하긴 했지만, 엄마의 입장에서 '각색'된 내용이 아닌 날 것 그대로를 들어보고 싶었다고나 할까요. 상대에 대해 정확히 알아야 싸우는 것도 잘 할 수 있고 합리적인 해결책도 찾을 수 있는데 그건 그 상대가 아이라 해도 마찬가지니까요.
평소 제가 우리집 아이를 주기적으로 인터뷰하면서 성장 기록을 쌓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지인의 딸은 같은 맥락에서 흔쾌히 인터뷰에 응했습니다. 아이는 매 질문마다 쉴 새 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냈는데요, 엄마가 아닌 제 삼자와는 감정 빼고 객관적으로 대화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작용했겠지만 그간 이런 '대화'가 고팠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것도 사실입니다.
다툼이 있을 때 다소 흥분한 상태에서 쏟아내는 '말'이 아닌 활자화 된 '기록'으로 사춘기 아이의 생각을 들어본 이번 일을 통해 저는 다시 한번 대화의 중요성을 깨달았습니다. 옆에서 지켜보기에 굉장히 따뜻하고 소통이 잘 되는 모녀 관계라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서로 깊은 대화가 필요한 지점에서 번번이 튕겨나가는 것을 보니 깊고 진지한 대화를 해본 경험이 부족하거나 익숙하지 않음에서 비롯된 문제로 보였습니다.
아, 가끔 오해하는 분들이 있는데, 사이가 좋다는 것과 대화가 잘 된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대화가 잘 되는 관계는 사이가 좋을 수밖에 없지만 사이가 좋다고 대화가 잘 되는 것은 아닌 것이죠. 즉, '필요충분'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대화'는 일상적인 그것보다 깊은 것을 말하는데, 그 대화는 충분한 연습이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그런 식의 대화 시간이 축적되면 상대에 대한 깊은 이해가 가능해지고 대화의 힘이 발휘되어야 할 결정적 순간에 큰 도움을 받게 됩니다. 이를테면 아이의 사춘기처럼 대부분의 부모와 자녀가 갈등을 겪는 시기 말입니다.
그러면 깊고 진지한 대화 훈련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갑자기 무겁고 심오한 주제로 이야기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자, 이제부터 우리 진지하게 대화 한 번 해보자' 하는 것은 더더욱 어색하고 불편하기만 합니다. 사소한 일상의 대화로 시작해 점점 화제를 확장하고 깊이를 더해가는 방식의 대화 기술이 필요합니다. 아이와 대화하는 자체를 즐기는 분이라면 조금만 의식하고 신경 써도 할 수 있는 방법이지만 일상 대화 자체가 어렵고 힘들다면 넘어야 할 산이 많을 겁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 노력들이 빛을 발하는 시기가 반드시 온다는 점입니다. 노력과 수고를 통해 대화 기술을 익혀나갈 필요가 있는 것이죠.
우리집은 A로 시작해 F까지 흘러가는 대화 방식이 아주 흔하게 벌어지는 풍경인데요, 최근의 일화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80년 만의 기록적인 폭우가 지나가고 며칠 후, 차를 타고 이동하던 중이었습니다. 반포대교 인근을 지나가다 물에 잠긴 잠수교를 보더니 아이가 불쑥 물었습니다.
"그런데 잠수교는 왜 잠수교라고 지었어? 반포대교 1, 2라고 할 수도 있었잖아."
"뭐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물에 잠기는 특징을 잘 살린 이름이 더 좋은 것 같은데? 반포대교 1, 2 라고 하면 어떤 게 1이고 2인지 사람들이 헷갈릴 수도 있을 테고 말야. 그리고 사실 잠수교가 먼저 생겼기 때문에 반포대교 1, 2가 될 수가 없었지."
저의 대답에 수긍한 아이가 다시 묻습니다.
"물에 잠기는 다리를 굳이 만들 필요가 있어?"
이 질문에 남편은 한국 전쟁 당시 한강 다리가 폭파 되면서 피난 가던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것에서 잠수교의 필요성이 제기됐다는 이야기, 잠수교는 낮고 폭이 좁아서 폭파로 파괴되더라도 덜 위험하고 복구가 쉽다는 특징 등을 설명해주었습니다.
여전히 물에 잠긴 한강변과 시설물들을 보면서 이야기는 지난 폭우로 옮겨갔습니다. 아이와 함께 아이 친구네 집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물 벼락 수준의 비를 만나 운전하면서 벌벌 떤 기억 등 경험담으로 시작해 주변에서 들은 이야기, 뉴스에서 본 수 천 대 차량의 침수 소식까지 이야기다가 자연스레 기후 변화 위기로 넘어갔지요. 전문가들이 이번처럼 기록적인 비가 앞으로는 더 잦을 것이라고 '경고'했는데 그 이유는 바로 기후 변화때문이었습니다. 폭우 외에도 전 세계가 겪고 있는 폭염과 같은 기상 이변도 역시 기후 변화에서 비롯된 것이고요. 우리는 기상 이변으로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는 심각한 상황에서 이제는 정말 아주 사소한 것들이라도 할 일을 찾아서 실천해야 한다는 의견들을 주고 받다가 이번 폭우로 인한 안타까운 사고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게 됐습니다.
폭우로 물이 차오른 길에서 갑자기 실종됐다가 맨홀에 빠지는 사고를 당한 희생자들 얘기를 하며 안타까워하고 있는데 아이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맨홀에 빠지면 나오면 되는 거 아니야? 나 같으면 합기도에서 배운 낙법을 이용했을 것 같은데."
아이 말을 듣다가 남편과 저는 황당하다는 듯 서로를 쳐다보았습니다. 말할 수 없이 참담한 사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아이가 멘트는 마치 희화화하는 것처럼 들렸거든요. 우리 아이가 이렇게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아이였던가 싶어서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그때 남편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느냐'며 무겁고 화가 난 목소리로 아이를 야단치기 시작했습니다.
아빠의 말을 다 들은 아이는 의기소침한 목소리로 말했어요.
"맨홀이 그렇게 위험한 곳이야? 만화 같은 데서 보면 맨홀에 빠졌다가 금방 올라오잖아. 나는 만화에서 본대로 맨홀이 그냥 낮은 구멍 같은 거라고 생각해서, 빠져 나올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말한 거였어."
아이의 답을 들은 남편은 잠시 생각하더니 아이에게 사과를 했습니다.
"그래, 그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아빠가 화를 낸 건 미안해."
저는 맨홀이 무엇이고 왜 위험한 지 등을 설명해준 후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가 늘 강조하는 말 있지? '역지사지'말이야. 우리는 항상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려고 노력해야 돼. 엄마는 사람들이 '역지사지'만 잘해도 크게 갈등을 겪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해. 엄마가 토론 수업을 할 때 찬성도 했다가 반대도 했다가 양쪽 의견을 내보라고 하는 것도 그래서야. 상대방 입장이 되어서 생각해보면 '아 그럴 수도 있겠다' 이해되는 부분들이 생기니까. 좀 전에 너랑 아빠의 대화에서도 역지사지 상황이 있었지? 아빠가 네 말을 듣고 '그럴 수도 있었겠다' 하는 거, 그게 바로 역지사지야."
분위기가 다소 가라앉아 있었으므로 저는 화제를 전환하기 위해 아이에게 질문을 하나 던졌습니다.
"그런데 맨홀 뚜껑이 왜 다 둥근지 알아? 네모나 삼각형은 왜 없을까? 좀 전에 우리가 맨홀 사고를 이야기했었잖아. 둥근 이유가 안전과도 관련이 있거든? 한번 생각해봐."
아이는 잠시 생각하더니
"네모나 삼각형은 잘못 놓으면 틈이 생기잖아. 그런데 원은 그렇지 않으니까 더 안전할 것 같은데?"
"음, 그것도 맞는 말이네. 그치, 삼각형이나 사각형은 귀퉁이를 잘 맞춰서 놓아야만 딱 맞게 들어가지만 원은 어떤 방향으로 돌려도 딱 들어 맞으니까. 그런데 이유가 또 있어! 원은 지름이 늘 같아서 뒤집혀 있거나 비스듬히 눕혀도 구멍 안으로 쏙 빠질 염려가 없어서 안전해. 그런데 사각형이나 삼각형 모양이라면 짧은 길이 쪽으로 세워져 있거나 비스듬하게 눕혔다가 구멍 안으로 쏙 빠져버릴 수 있으니 위험하지."
거기까지 설명하고 난 후 얼마 전 <어린이 수학동아>에서 읽었던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가 생각나 말을 덧붙였습니다.
"그런데 말야, 삼각형 중에서도 맨홀 뚜껑으로 쓸 수 있는 삼각형이 있대!"
신기해 하던 아이는 정삼각형이 아니냐고 물었는데 정답은 아니었습니다.
"뢸로 삼각형이란 게 있대. 반지름이 똑같은 원 세 개를 겹쳐 놓았을 때 세 개의 원이 겹치는 가운데 부분이 생기는 삼각형을 말하는데 그림을 그려보면 알겠지만 우리가 아는 삼각형은 아니고 약간 둥근 형태야. 이 삼각형은 너비가 일정해서 빙글빙글 돌려도 너비가 같아서 구멍 안으로 빠지지 않는 거지."
집에 돌아온 저는 잊지 않고 '뢸로 삼각형'을 찾아 보여주는 것으로 그날 잠수교에서 시작해 맨홀의 수학적 접근으로 끝난 이야기의 대장정을 마무리했습니다.
그날 이야기의 흐름은 억지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지막 맨홀과 안전, 수학의 관계 등은 다소 무거워진 대화를 가볍게 하면서 아이의 호기심을 자극하고자 하는 저의 '의도'가 포함돼 있긴 했지만, 나머지 대화는 지극히 일상적인 대화로부터 시작되고 흘러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대화가 자연 발생적으로 진행된 게 아닌 것도 사실입니다. 단순히 '비가 많이 왔다->다리가 잠겼고 사고가 많았다->안타깝다'의 단편적 대화로 끝날 수도 있었던 것을 더 깊이 있는 대화로 만들어 서로 묻고 답하고 생각할 수 있게 만드는 데는 분명 어른들의 노력이 필요했죠.
아이의 질문 하나에도 상세히 답해주고 그 안에서 파생된 질문을 역으로 다시 던지고, 관련된 상황이며 화제들을 연결하면서 아이의 생각도 들어보고 엄마 아빠가 가진 가치관이나 사고 방식도 알려주고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공유하고 그 일들을 바라보는 바른 시각도 키울 수 있도록 대화를 이끌어나간 것입니다.
물론 모든 집에서 이러한 대화가 이뤄지기는 어려울 수 있을 겁니다. 특히 경험이 부족하거나 습관이 되지 않은 경우라면 A에서 B로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첫 단계부터 힘이 들 수 있습니다. 아이가 어려서 대화에 올릴 수 있는 주제나 소재가 제한적이라면 더더욱 그럴 테고요.
그러나 우리집도 처음부터 이런 대화가 가능했던 것은 아닙니다. A에서 B로 그 다음은 C로, 이 과정이 하나씩 하나씩 진행되고 반복되다 보면 D-E-F로도 얼마든지 연결되고 확장될 수 있는 것이죠. 모든 기술이 그러하듯 시간을 두고 천천히 다져나가는 것만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대화의 기술도 마찬가지고요.
지금 당장 쉬운 것부터 시작해보세요. 짜장면을 먹고 있다면 중국 이야기로 연결할 수도 있겠네요. 그리고 우리가 먹는 짜장면이 중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한국식 요리라는 얘기도 할 수 있겠네요. 더 나아가 다른 중국 요리들을 말할 수도 있고, 일본 라멘과 한국 라면 이야기도 할 수 있겠고요.
매번 모든 대화를 이렇게 하려면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할 거예요. 걱정 마세요,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요. 어쩌다 '재밌는' 소재가 있고 연결 고리들을 엮어나갈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그때 그때 시도하면 됩니다. 노력은 하되 부담은 내려놓으세요. 부담을 갖는 순간 대화는 재미 없어지고 재미 없이 이어 붙이기만 하는 대화는 '내 것'으로 남지 않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