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누구나 예술가다, 독일 미술 교육은 아이를 어떻게 바꾸어 놓았을까
스스로도 '그림을 못 그린다'고 평가하는 아이는 그러나 생각한 바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데에는 자신감이 있습니다. 독일 교육이 바꿔 놓은 생각의 차이 때문입니다.
"오, 이거 네가 그린 거야? 이 챕터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어서 좋네!"
역사 수업 과제로 포트폴리오 작업을 하던 중인 아이가 챕터별 표지마다 그려 넣은 그림에 대한 저의 피드백이었습니다. 고대 그리스를 테마로 각자 몇 개의 주제를 선정해 자료 조사하고 정리해서 일종의 자기만의 '책'을 만드는 것과 비슷한 작업이었는데요, 제작 후 부모님에게 보여주고 피드백을 받아오는 과정까지 포함이라 '의견'을 묻더라고요.
내용은 독일어로 돼 있어서 안타깝게도(?) 꼼꼼히 피드백을 줄 수 없어서 그랬는지, 챕터별 표지 그림이 특히 눈에 띄더군요. 올림푸스 신들에 관한 챕터, 고대 그리스 경제에 대한 챕터 등, 그림은 아주 간단한 수준이었으나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적절하게 잘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아이 그림에 대한 제 반응을 본 아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근데 J가 그린 거에 비하면 그림도 아니야. 걔는 진짜 살아있는 것처럼 그림을 그려. 나는 우리반에서 그림을 제일 못 그리는 편이야."
같은 반에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어마어마한 실력자가 있는데, 아이는 늘 그 친구의 그림을 보고 와서 할 수 있는 모든 찬사의 말을 쏟아내고는 했습니다. 솔직히 우리집 아이는 그림을 '잘' 그리는 편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이 말마따나 못 그리는 쪽에 가깝죠. 그래도 '반에서 제일 못 그리는 편'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리더라고요. 그로 인해 상처 받고 있는 건가 싶어서 "그림 그리는 거 배워보고 싶어?"라고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아니"라는 말 뒤에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사람은 다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게 있잖아. 한 사람이 어떻게 모든 걸 다 잘할 수 있겠어. 나는 손으로 그리는 그림은 제일 못 그리지만 디지털 아트는 우리 반에서 제일 잘해."
(아닌 게 아니라 디지털에 능한 아이는 그림 그리는 AI 프로그램인 '달리(Dalle)'를 이용해 그림 그리고 표현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우주도 그리고 풍경화도 그리고 디자인도 하죠. 같은 그림을 좀 다른 버전으로 그려서 비교하기도 하고요.)
자신감 하나는 대단합니다. 어쩌면 미술 과목에서 '신의 손'이라 불리는 친구 J와 똑같이 늘 최고 레벨의 점수를 받고 있다는 게 하나의 이유일 겁니다. 만일 우리나라 미술 교과였다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상황일 거예요. 이론 시험이야 그렇다 치고 실기 점수에서 그 차이를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테니까요.
서론이 길었습니다만, 오늘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바로 자타 공인 '그림 못 그리는' 아이에게 자신감을 충만하게 심어준 '독일 미술 교육'에 관한 것입니다.
독일 교육 현장에서 이런저런 깨달음을 얻을 때가 많지만, 그 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몇 장면을 꼽아보라고 하면 단언컨대 '그날'이 떠오릅니다.
2019년 초 여름 어느 날, 당시 아이의 2학년 학기 말 미술 작품 전시회가 있었습니다. 일 년 동안 아이들이 그리거나 만든 작품을 전시하고 학부모님들에게 선뵈는 자리였습니다. 2학년 때 누구나 겪는 이벤트라 저 역시 '의례적'으로만 생각했는데 그날 현장에서 약간의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전에, 앞에서도 말했지만 우리 아이는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가 아닙니다. 한국에서 유치원을 다닐 때는 여름 풍경에 가을 과일을 그려 넣고, 바닷속 그리기에 새를 그려 넣어 지적을 받는 일도 있었고요. 심지어는 아이 5세반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동그라미 그리기 연습을 시켜달라'는 전화를 받아본 경험도 있습니다. 당시에는 왜 동그라미를 잘 그려야 하는지, 그게 집에서 연습까지 할 일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선생님 말씀은 그랬습니다. '동그라미 그리는 것도 어려워해서 아이가 미술 시간에 적극적이지 않다'고 말이죠.
이런 상황이니 아이는 미술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주눅이 들었어요. 저는 오히려 아이의 상상력을 칭찬해주거나 '동그라미를 잘 그리고 못 그리고는 중요한 게 아니다'라는 말로 위로했지만 아이 머릿속에는 언제나 '나는 그림을 못 그리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자리잡았죠.
그랬던 아이가 독일에서 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음악 시간 다음으로 미술을 가장 좋아했습니다. 그새 특별히 실력이 나아졌을 리 없는데 아이는 생각하는 대로 그리고 만들며 자신의 아이디어를 표현하는 데 거리낌이 없어졌어요. 제가 그 배경으로 추측한 한 가지는 잘 그린 그림과 못 그린 그림에 대해 평가하지 않고, 잘못된 표현에 대해 지적하지 않고, 각자의 작품에서 장점을 찾아 칭찬해주는 미술 수업의 방향성이었습니다. 그리고, 2학년 말 열린 통합 전시회에서는 '교장 선생님의 발언'을 통해 아이가 한국에서와 달리 미술을 좋아하게 된 보다 궁극적인 이유를 알게 됐죠.
전시를 오픈하기 전, 부모님들을 한 공간에 불러 모은 후 교장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는 미술 교육은 작품을 만드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결국 언어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대중 앞에서 발표하는 것을 최종 목표로 합니다. 아이들은 자신의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바를 각각 다른 형태의 결과물로 만들어냈는데요, 다시 자기가 만든 결과물에 대해 언어를 통해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 겁니다. 어떤 의도가 있는지 왜 그렇게 표현했는지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지 등등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오늘 부모님들은 감상만 하시는 게 아니라 아이들에게 최대한 많은 질문을 해주셔야 합니다."
저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어요. 미술 교육은 창의적인 생각을 표현하는 것으로, 그러니까 결과물이 나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저는 '생각을 다시 언어로 표현해 내는 것이 최종 목표'라고 하는 지점에서 그동안 제가 알던 세상이 그 경계를 확장해 열리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독일 미술 교육에 의하면 아이들의 결과물을 일부러 평가하지 않은 게 아니라 평가를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누군가의 머릿속 생각을, 그 생각한 바를 드러낸 결과물을, 그 결과물에 대한 언어적 표현을 누가 평가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것이 바로 독일 미술 교육의 힘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순간이었습니다.
전시가 열리는 장소에 가니 아이들은 각자 자신이 만든 작품 앞에 서 있었습니다. 아주 자신만만한 태도로 관객들의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지요. 그날 '인피니티'라는 제목의 개인 추상 스케치 작품을 전시한 우리 아이는 많은 부모님들로부터 작품의 의도며 발상, 표현 방법 등에 대한 질문을 받았습니다. 점과 점을 무수히 연결한 스케치 작품일 뿐인데 대답하는 걸 듣고 있으니 그 안에 많은 생각들을 담아냈다는 게 보이더군요.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객관적으로 잘 그린 그림도 있고 못 그린 그림도 있고 도대체 무엇을 표현하고자 했는지 알 수 없는 것들도 많았지만 아이들은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자기만의 표현 방식에 따라 만들어낸 창작물에 대해 '다시 언어로 설명'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는 지금도 스스로 '그림을 잘 못 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인정하지만 부끄러워하지는 않습니다. 사진처럼 정교하고 정확하게 그리지 못한다고 해서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그려낼 수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미드저니, 달리(Dalle) 같은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텍스트만 입력하면 그림을 그려주는 시대가 오긴 했지만, 내가 생각한 바를 완벽히 그대로 구현해주지는 못합니다. 그런 이유로 그림을 잘 그린다는 건, 온전히 자기 생각을 손끝으로 표현해낼 수 있는 특별한 능력임에 틀림 없습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림을 잘 그리는 능력 자체에 대한 평가절하가 아니라 미술 교육이란 것이 결과물이 아닌 생각하는 과정, 그리고 각자의 표현 방식에 중점을 둘 때 교육적 목표를 더 잘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죠.
'모든 아이는 예술가로 태어난다'고 피카소가 했던 말은, 어쩌면 예술성에 대한 개념 자체의 차이 때문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아이들은 누구나 고유한 존재이고 생각하는 바도 모두 독창적입니다. 그 생각을 꺼내어 자기만의 표현 방식으로 구현해보고, 또 그 결과물에 대해 설명하며 인정받고 격려 받는 교육 환경이라면 누구나 '잘 그리고 못 그리고에 상관 없이' 자신감 충만해지지 않을까요.
저도 그런 식의 교육을 받았더라면 어땠을까 돌아봅니다. 아이에게 그림 못 그리는 유전자를 물려준 것으로 추정되는 저는 초중고 시절 미술 시간을 좋아하지 않았거든요.